2025년, 한국은 역사적 기로에 서 있다.

OpenAI가 DevDay 2025 행사에서 AI 모델부터 개발 도구, 하드웨어 인프라, 최종 사용자 디바이스까지 전체 스택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드러낸 순간, 전 세계는 새로운 기술 패권의 탄생을 목격했다. 마치 과거 애플이 iOS 생태계로 모바일 시대를 지배했듯, 소수의 AI 거대 기업들이 차세대 컴퓨팅 플랫폼을 독점하려 한다. 이는 한국에게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AI 기술의 급속한 대중화로 산업 전반에 새로운 혁신의 계기가 마련되지만, 동시에 핵심 AI 인프라와 모델이 소수 거대 기업에 집중되면서 또 다른 기술 종속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

우리는 이미 이 길을 걸어본 적이 있다. 모바일 OS를 갖지 못해 애플과 구글의 생태계에 종속되었던 뼈아픈 경험. 그 교훈을 되풀이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생존 전략을 찾을 것인가. 문제는 명확하다. AI 시대에 기술 패권을 쥔 외부 플랫폼에 종속될 경우, 제조업부터 서비스업까지 전방위에서 주도권을 내주는 기술 종속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지금이 한국이 가진 독특한 강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AI 산업의 구조 변화 속에서 한국이 선택해야 할 전략적 방향성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특히 AI 제조 산업, 즉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리쇼어링(제조 본국 회귀)과 다크팩토리(무인 공장)로 대표되는 제조 패러다임 전환 속에서 한국 제조업의 생존 해법을 분석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1800년대 말 제조업 시대에 철강 파워가 국가 경쟁력의 중심이었듯, AI 시대에는 파운데이션 모델(Foundation Model)이 핵심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 모델 개발 경쟁에 늦었다. 그러므로 1960년대부터 그랬던 것처럼 재료를 모아 중간재를 만들어 수출하는 길을 가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의 30년을 기약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범용 AI 자체를 새로 만드는 정면 승부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지금, AI 시대의 ‘중간재 강국’이 되는 대안적 전략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Foundation 모델 중심 패권 구조의 본질과 한계

오늘날 AI 산업의 권력 구조를 살펴보면, 거대 파운데이션 모델을 보유한 극소수의 플레이어가 정점에 서 있는 피라미드형 계층이 두드러진다. GPT-5나 CLAUDE-4.5 같은 범용 초거대 AI 모델을 개발하고 유지하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자원 투입이 필요하다. 수조 개에 달하는 데이터를 수개월 이상 학습시킬 대규모 컴퓨팅 인프라와, 이를 설계·운용할 세계 최정상급 AI 연구 인재풀이 필수적이다. 이런 “슈퍼 자본 + 슈퍼 인재” 조합을 갖춘 구글, OpenAI, 메타 등의 글로벌 빅테크 기업만이 이 거대 모델 경쟁에서 앞서 있으며, 세계 톱 수준의 AI 모델을 사실상 독점 보유한 상황이다. 초기 시도는 있었지만, 한국의 하이퍼클로바나 엑사원 등 자체 LLM들도 이러한 글로벌 최상위 모델들과의 성능 격차가 벌어지며 존재감이 크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파운데이션 모델 중심의 기술 패권 구조가 형성되면서, AI 시대의 주도권은 자칫 소수 기업과 특정 국가에 집중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들이 제공하는 거대 모델과 클라우드 API에 의존해 각국 기업들이 응용 서비스를 만들게 되면, 마치 모바일 시대에 앱 개발사들이 애플 iOS나 구글 안드로이드 생태계에 종속되었던 것과 유사한 양상이 펼쳐질 수 있다. 한국은 자체 모바일 OS를 갖지 못해 플랫폼 종속을 뼈아프게 경험한 바 있는데, AI 시대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실제 AI 업계 일각에서는 “LLM 주권이 없는 국가들은 갈수록 빅테크 보유국의 기술 종속 늪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AI 핵심 기술이 외부에 있으면 산업 적용도 제약을 받고, 나아가 AI 윤리와 거버넌스 규범 설정에서도 주도권을 상실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 기술 질서의 구조적 한계와 균열도 분명히 존재한다. 우선 하나의 범용 모델이 모든 산업 분야의 요구를 완벽히 충족시키기는 어렵다. 아무리 거대해도 범용 데이터를 학습한 AI는 특수 분야의 문맥과 규제 요건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해 상황착오를 일으킬 수 있다. 실제로 ChatGPT 같은 모델을 법률 자문에 활용하는 과정에서, 존재하지 않는 판례나 법 조항을 그럴듯하게 제시하는 바람에 신뢰성 문제가 드러난 사례도 있다. 이러한 범용 AI의 빈틈 때문에 각 산업에 특화된 모델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으며, 이미 미국, 이스라엘 등은 금융·의료·법률 등 정밀성과 규제가 중요한 영역부터 산업별 특화 AI 시장을 선점해 독자 생태계를 구축해가고 있다. 한편 개방형 오픈소스 LLM들의 등장과 경량화된 소형 모델들의 발전은 이 거대 모델 중심 구조에 작은 균열을 내고 있다. 이제 꼭 거대 자본과 인프라가 아니더라도, 창의적인 활용과 융합을 통해 특정 분야에서 세계적 AI 경쟁력을 발휘할 여지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현재 AI 기술의 중심추는 파운데이션 모델에 쏠려 있으나 그 자체를 확보하지 못한 나라라고 해서 반드시 AI 시대의 기회를 잃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전략의 무게중심을 옮길 경우 새로운 돌파구가 보인다.

중간재 전략의 역사적 맥락과 현재 적용 가능성

한국 경제사는 중간재 전략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 20세기 후반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은 선진국이 이미 장악한 원천 기술이나 최종재를 정면으로 추격하기보다, 재료를 수입하여 중간재를 가공·조립해 수출하는 모델로 성장 동력을 확보했다. 1960년대 이후 섬유·의류 산업에서 원단과 부자재를 들여와 완제품 의류를 수출하고, 1970~80년대에는 철강·석유화학 등 기초소재 산업에 투자하여 제조업의 뿌리를 다졌다. 1990년대 전자산업에서도 핵심 부품과 소재를 국산화함으로써, 완제품 조립 위주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가치사슬 참여를 이루어냈다. 이러한 “묵묵한 중간 역할” 전략 덕분에 한국은 자동차, 가전, 반도체 같은 분야에서 글로벌 브랜드를 키워내기 전까지 필요한 공급망 입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

이제 AI 산업에서도 중간재 전략이 통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앞서 이야기한 “재료를 모아 중간재를 만들어 수출해야 한다”는 것은, AI 분야에서 한국이 잘할 수 있는 영역을 선별하여 글로벌 공급망의 필수 연결고리가 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재 AI 생태계에서 한국이 비교우위를 가진 재료 또는 부품에는 무엇이 있을까? 대표적인 것이 반도체다. AI 시대의 연료라 불리는 반도체 산업에서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고성능 AI 연산에 필수적인 HBM이나 AI용 D램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의 기술력과 생산능력은 독보적이며, ChatGPT 같은 초거대 모델을 개발하는 기업들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어 공급을 주도할 잠재력도 충분하다. 실제로 AI 모델이 거대해질수록 메모리 수요가 폭증하고 있어, 메모리 강국인 한국은 AI 인프라 측면에서 중간재 공급자로 막대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또 다른 중간재 기회로 주목되는 분야는 AI 전용 반도체 및 하드웨어다. GPU에 주로 의존해 온 AI 가속기 시장에 도전하는 퓨리오사AI, 리벨리온, 딥엑스 등 국내 스타트업들은 이미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향후 AI 서비스 확산 국면에서 이들의 국산 AI 칩 활용도는 더욱 늘어날 수 있다.

제조업 자동화를 위한 산업용 로봇과 공작기계 역시 한국이 강점을 가진 중간재다. 한국은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3위 규모의 공작기계 생산국이고, 산업용 로봇 기술력도 세계 선두권에 속한다. 마침 전 세계적으로 다크팩토리 전환 움직임이 일면서 한국산 로봇과 공작기계에 대한 해외 수요도 기록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2025년 1분기 한국 공작기계업계의 해외 수주액은 5,162억 원으로 분기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고, 산업용 로봇 수주액도 2018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글로벌 제조기업들이 생산 공장의 무인화·자동화 투자에 본격 나서면서, 한국의 중간재인 로봇·장비가 각광받는 것이다. 이렇듯 AI 생산 인프라 측면에서 한국은 반도체-장비-로봇으로 이어지는 든든한 공급 능력을 갖추고 있고, 이는 AI 시대의 ‘철강’이라 할 핵심 요소들을 우리가 책임질 수 있다는 뜻이다.

소프트웨어 영역에서도 중간 매개 역할을 고민할 수 있다. 비록 범용 LLM 자체 개발에서는 뒤처졌더라도, 이를 활용한 도메인별 데이터 세트 구축이나 한국어·산업현장 특화 모델 개발은 현실적인 목표다. 예컨대 제조 공정의 센서 로그와 설비 유지보수 기록 같은 산업 데이터 등은 해외 빅테크가 쉽게 확보하기 어려운 소중한 재료다. 이러한 데이터 자산을 잘 가공해 산업별 특화 AI 모델을 만들고, 이를 국내외에 서비스 형태로 제공한다면 일종의 AI 중간재 수출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남들이 만든 기반 기술을 그저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만의 소재와 노하우를 섞어 새로운 중간 가치를 창출해내는 것이 이 전략의 핵심이다. 이는 과거 제조업에서 부품·소재 강국을 지향했던 한국 산업 발전의 DNA와도 맥을 같이한다.

제조 공장에서 지능형 공장으로

지금까지 살펴본 한국의 중간재 강점—반도체, 로봇, 공작기계, 산업 데이터—은 단순히 개별 부품을 공급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이들은 하나로 통합될 때 진정한 시너지를 발휘한다. 바로 AI 기반 지능형 제조 시스템, 즉 다크팩토리로의 전환이다.

한국이 보유한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하드웨어에 LLM과 AI 기술을 결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공장 설비가 스스로 데이터를 분석하고, 생산 공정을 최적화하며, 품질 문제를 예측하고, 공급망을 자율 조정하는 완전 자동화 제조 생태계가 구현된다. 이것이 바로 제4 제조 시대의 핵심이다.

한국은 이미 이 전환의 모든 조각을 갖추고 있다. AI 연산을 위한 HBM 메모리, 24시간 가동되는 산업용 로봇, 정밀 가공을 위한 공작기계, 수십 년간 축적된 제조 현장 데이터, 그리고 이를 통합할 소프트웨어 역량까지. 문제는 이를 어떻게 연결하고 패키지화하여 글로벌 시장에 제공하느냐다.

제조 LLM은 여기서 핵심적인 접착제 역할을 한다. 범용 ChatGPT가 일반적인 대화를 처리한다면, 제조 특화 LLM은 “이 설비의 진동 패턴이 비정상적인데 어떤 부품을 언제 교체해야 하는가?”, “원자재 가격 변동을 고려할 때 최적의 생산 스케줄은?”, “이 불량품은 어느 공정에서 발생했고 재발 방지책은?” 같은 제조 현장의 실질적 문제를 해결한다. 한국의 제조 데이터와 현장 노하우를 학습한 이런 특화 모델은, 단순히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한국 제조업 50년 경험의 디지털 결정체다.

이제 이 조각들이 실제로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지, 그리고 왜 전 세계가 한국의 제조 혁신에 주목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다크팩토리와 AI 리쇼어링의 흐름에서 한국의 강점

인류 제조업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지금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1차 제조 시대는 수공업의 시대였다. 장인의 손길로 하나하나 만들어지던 제품들이 세상을 채웠다. 2차 제조 시대는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증기기관과 기계화가 생산성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3차 제조 시대는 포드주의로 대표된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며 제조업은 현대적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제4 제조 시대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이 시대의 핵심은 바로 다크팩토리다. AI와 로봇이 주도하는 완전 자동화 공장이 새로운 제조 패러다임을 만들어가고 있다. 특히 이러한 다크팩토리의 확산은 리쇼어링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더 이상 값싼 노동력을 찾아 해외로 나갈 필요가 없어지면서, 선진국들은 첨단 자동화 공장을 자국에 다시 세우고 있는 것이다.

제조업 분야에서는 이미 리쇼어링과 다크팩토리 흐름이 본격화되며 한국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다크팩토리는 이른바 ‘불 꺼진 공장’, 즉 인간 노동자 없이 24시간 가동되는 완전 자동화 공장을 뜻한다. 센서와 로봇, AI 제어 시스템이 원자재 투입부터 제품 출하까지 모든 과정을 수행하기 때문에 조명이나 냉난방도 필요 없는 궁극의 스마트팩토리다. 인건비 상승과 공급망 불안에 직면한 제조기업들이 이 무인 공장을 통해 해법을 찾으려 하고 있으며, 미·중 갈등과 보호무역 강화 속에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자국 내 첨단공장 투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유럽에서도 품질 향상과 공급망 안정성을 이유로 생산 기지를 다시 들여오는 추세다. 이제 “값싼 인건비를 찾아 해외로 생산 기지를 이전”하던 공식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관세에 대응하는 여러 전략이 있지만, 무인화·자동화를 통한 비용 혁신만큼 확실한 해법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흐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한국 제조업의 높은 자동화 역량이다. 국제로봇연맹(IFR)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제조업 근로자 1만 명당 로봇 932대를 활용하고 있어 이 부문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자동차, 전자 등 주력 산업 대기업 공장에서 축적된 자동화 노하우와 로봇 활용 경험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덕분에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한국 기업들은 미국과 국내에 최첨단 스마트팩토리를 속속 구축하고 있다. 가령 현대차그룹이 미국 조지아주에 건설 중인 전기차 공장(메타플랜트 아메리카)은 약 1,000대의 로봇을 투입해 용접, 도장, 조립, 물류를 모두 자동화하는 무인 생산체제를 갖출 예정이다. 이는 한국 제조기업이 글로벌 제조 패러다임 전환을 선도하는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한국산 제조 장비와 솔루션도 각광받고 있다. 앞서 언급한 공작기계와 로봇 수출 호조는 세계적인 다크팩토리 열풍 속에서 한국이 제조 자동화 인프라 공급국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스마트팩토리 운영 소프트웨어, 공정 최적화 AI 알고리즘 등 제조 IT 솔루션 분야에서도 국내 기업들이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사실 한국은 2010년대부터 중소기업 스마트공장 보급 사업 등을 통해 제조 현장의 디지털 혁신 기반을 닦아 왔다. 아직 독일·미국 등에 비해 중소 제조업체의 자동화 수준은 낮지만, 대기업에서 검증된 기술을 중소기업으로 확산하기만 한다면 국가 전체 제조 경쟁력의 비약적 향상도 기대할 만하다. 정부 역시 2013년 일명 유턴법을 제정해 해외 진출 기업의 국내 복귀를 지원해왔지만 성과가 미흡하자, 법제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 하에 디지털 제조혁신을 병행 추진 중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한국이 가진 독특한 위치다. 우리는 자본도 있고 제조업도 있고 사회 인프라도 우수하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개발이 모두 가능한 몇 안 되는 국가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소한 조합이다. 미국이 리쇼어링을 본격화하려면 다크팩토리를 구축해야 하는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협력 파트너로서 한국이 사실상 유일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최근 여러 미국 빅테크 기업들과 다크록 같은 글로벌 투자사 회장까지 한국을 찾아와 투자를 논의하는 이유다. 미국이 제조업에서 경쟁력을 회복하려면 다크팩토리를 통한 리쇼어링이 필수적인데, 이를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과거에는 항상 우리나라가 선진국 기술을 배우는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중간재를 만들어 기존의 제조 역량과 제조 인프라, 그리고 소프트웨어 개발 능력까지 묶어서 우리도 미국에 기술을 수출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요컨대, AI 리쇼어링 시대에 한국은 이미 높은 자동화 기술력과 생산 인프라를 갖춘 만큼, 이를 발판 삼아 제조강국의 위상을 재정의해야 한다. 이제 우리의 경쟁력은 값싼 노동력이 아닌 똑똑한 공장에서 나오고 있다.

응용과 버티컬 LLM으로 가는 전략적 분화와 실행 조건

지금까지 AI 인프라 측면에서 중간재 전략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소프트웨어와 응용 서비스 측면에서도 한국은 자신만의 차별화된 길을 모색해야 한다. 다행히 전 세계적으로도 “초거대 모델 자체를 새로 만들기보다, 작은 모델을 활용해 산업 특화 AI 솔루션을 제공하는 쪽으로 전략 전환”이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국내외 수많은 AI 기업들이 거대 LLM을 그대로 서비스에 쓰기보다, 해당 도메인에 맞게 경량화·튜닝된 버티컬 AI에 집중하는 추세다.

버티컬 LLM이 주목받는 이유는 명확하다. 범용 AI의 양을 키우는 것보다, 각 현장의 질에 맞춘 모델이 실제 문제 해결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의료, 금융, 법률처럼 전문지식과 정확성이 생명인 분야에서는 아무리 GPT-5같이 우수한 범용 모델도 치명적 오류를 낼 수 있다. 반면 해당 분야의 용어, 문서 구조, 규제 요건을 학습한 특화 모델은 훨씬 맥락에 맞는 답변과 의사결정을 내놓는다. 기업들도 모델 파라미터를 무작정 키우는 대신 양질의 도메인 데이터로 성능을 끌어올리는 정밀화 전략으로 선회하고 있다. 이렇게 탄생한 경량 특화 AI는 응답 정확도와 신뢰성 면에서 범용 AI를 앞지르며 실용 가치를 입증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한 스타트업은 변호사용 리걸 AI 모델로 2025년 6월 약 3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하여 기업가치 50억 달러를 인정받았고, 국내에서도 판례 분석과 계약 검토를 몇 초 만에 해내는 법률 특화 LLM 서비스가 등장하는 등 다양한 버티컬 AI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이제 기업들은 자신의 분야에 꼭 맞는 AI 파트너를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 같은 전략적 분화에 있어, 한국은 산업별 응용 분야에서 고유한 강점을 살릴 수 있다. 가령 제조 분야를 보면, 한국은 세계적 제조기업들과 스마트팩토리 경험을 보유하고 있어 제조 공정 특화 AI를 개발하기에 유리하다. 방대한 설비 데이터와 현장 노하우를 결합한 제조 LLM이 나온다면, 공장 운영 효율화는 물론 품질 향상과 예지보전 등 제조 혁신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게임·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는 K-콘텐츠 강점을 살려 몰입형 AI NPC, 스토리 생성 AI 등 차별화된 응용을 선보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버티컬 전략이 성공하려면 몇 가지 실행 조건이 따른다. 그리고 이는 각 주체별로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첫째, 도메인 데이터 확보와 개방이다. 특화 AI의 성패는 해당 분야의 고품질 데이터 축적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와 정책 담당자는 제조 현장 데이터의 표준화와 개방을 위한 법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개인정보와 영업비밀 보호를 전제로, 산업별 데이터 허브를 구축하고 중소기업도 접근할 수 있는 데이터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기업들은 자사의 제조 데이터를 디지털 자산으로 인식하고 체계적으로 축적해야 한다. 수십 년간 쌓인 공정 데이터, 품질 기록, 설비 로그는 그 자체로 경쟁력이다. 이를 정제하고 AI 학습에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관리하는 것이 시급하다.

둘째, 융합 인재 양성과 협업 플랫폼이 중요하다. AI 전문가와 각 산업 도메인 전문가가 유기적으로 협력해야만 우수한 특화 모델이 나온다. 정부는 융합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혁신에 나서야 한다. AI 전문가와 제조·의료·금융 도메인 전문가를 연결하는 산학 협력 프로그램을 대폭 강화하고, 평생교육 체계를 통해 기존 인력의 재교육도 지원해야 한다. 기업들은 버티컬 AI 개발에 과감히 투자하고, 기존 제조 인력에게 AI, 데이터 분석 역량을 교육하여 사람과 AI가 협업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학계와 연구기관은 산업 특화 AI 모델 연구에 집중하고, 산학 협력을 넘어 ‘산학연 융합’을 실천해야 한다. 기업의 실제 문제를 연구 주제로 삼고, 연구 성과를 즉시 산업 현장에 적용하는 순환 구조가 필요하다.

셋째, 글로벌 연계와 표준화 참여다. 한국이 강점을 지닌 버티컬 AI 분야가 있다면 국제 표준과 오픈소스 커뮤니티에 적극 기여하여 생태계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 정부는 한국이 강점을 가진 제조 AI, 로봇 분야의 국제 표준 제정 과정에 선제적으로 참여하여 글로벌 룰 메이킹에 기여해야 한다. 기업들은 미국 리쇼어링, 유럽 제조업 혁신 프로젝트 등에 한국의 로봇, 자동화 솔루션을 공급하는 파트너십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연구자들은 한국이 개발한 산업 특화 모델, 데이터셋, 도구를 국제 오픈소스 커뮤니티에 공개하여 글로벌 표준을 선점하고 생태계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 국내에만 통하는 ‘갈라파고스’ 전략을 지양하고 처음부터 개방성과 국제 협력을 전제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넷째, 전략적 투자와 미래 대비다. 정부는 AI 반도체와 로봇 산업에 대한 전략적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 HBM, AI 가속기, 산업용 로봇은 중간재 전략의 핵심이다. R&D 세액공제 확대와 함께 글로벌 파트너십 구축을 지원해야 한다. 기업들은 범용 ChatGPT를 쓰는 것에 그치지 말고, 자사 업종에 특화된 AI 모델 개발이나 맞춤화에 투자해야 한다. 이는 단기 비용이 아닌 장기 경쟁력의 원천이다. 연구자들은 당장의 중간재 전략을 실행하면서도, 차세대 AI, 양자컴퓨팅, 차세대 로봇 등 미래 기술에 대한 기초 연구를 병행해야 10년 후에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이 갖춰지고 각 주체의 노력이 하나로 모일 때, 한국 기업들은 버티컬 AI와 응용 서비스 분야에서 규모가 아닌 창의성과 융합력으로 승부하는 새로운 장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기술 종속을 피하는 길, AI 시대 ‘중간재 강국’으로서의 생존 전략

AI 시대를 맞이한 한국이 직면한 도전은 분명하다. 글로벌 거대 기업들이 AI 플랫폼 패권을 노리는 가운데,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새로운 기술 종속, 더 나아가 기술 식민지나 다름없는 처지에 놓일 수 있다. 하지만 희망의 단초는 있다. 산업화 시대에 그랬듯, 반드시 원천 기술을 자체 개발하는 길만이 살 길은 아니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여 대체 불가능한 가치를 제공한다면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 AI 분야에서의 중간재 전략은 바로 그 돌파구다.

물론 이러한 전략이 LLM 주도권 확보를 완전히 대체하는 만능열쇠는 아닐 것이다. 여전히 핵심 모델과 클라우드 인프라는 해외 의존도가 높고, AI 윤리나 표준 논의에서도 주도권을 잡기 위한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소한 중간재 전략을 통해 기술 종속의 늪은 피할 수 있다. 반도체와 로봇처럼 남들이 꼭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가 공급하고, 동시에 제조·의료·콘텐츠 등 다양한 응용 분야에서 특화 AI 솔루션을 선보인다면, 한국은 AI 시대에도 단순 소비자가 아닌 기여자로 남을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 AI 기술 혁신은 3개월 단위로 격변하고 있고, 한 번 글로벌 표준과 생태계가 굳어지면 나중에 따라잡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선제적인 투자와 규제 혁신, 인재 양성을 통해 우리만의 중간재 전략을 속도감 있게 실행에 옮겨야 할 것이다. 과감하고도 현명한 선택으로 AI 시대의 거센 파고를 넘어선다면, 한국은 비록 AI 엔진 자체는 남의 것을 쓰더라도 그 엔진에 필수적인 연료와 부품을 공급하는 AI 시대의 중간재 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기술 종속을 피하면서도 우리가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는 길이다.

참고 자료

〈대형 LLM 경쟁에서 멀어진 한국, 새로운 AI 전략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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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다크 팩토리’ 열풍에…K로봇 해외수주 ‘역대 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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