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더 적은 게 더 큰 힘이다
맬서스의 예언과 하버-보슈의 기적, 그리고 AI라는 새로운 변수
토마스 맬서스는 인구를 경제적으로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학자였다. 그는 1798년 발표한 인구론을 통해 인류에게 암울한 미래를 예언했다. 인구의 자연적 증가는 기하급수적인 반면, 식량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만 증가하기 때문에 과잉인구로 인한 식량부족은 필연적이며, 그로 인해 빈곤과 죄악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맬서스와 후대 학자들은 지구가 부양할 수 있는 최대 인구를 약 15억으로 추산했고, 이를 넘어서면 전쟁과 기아 같은 재앙이 발생해 인류가 파멸로 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20세기 초 세계 인구가 15억에 근접하자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맬서스의 인구론에 따르면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제한된 자원을 놓고 벌이는 생존경쟁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당시 많은 지식인들은 맬서스의 예언이 현실이 되는 것을 목격하며 인류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그런데 맬서스가 예측한 인구 한계를 훨씬 넘어선 지금, 왜 인류는 여전히 생존하고 있는가? 답은 산업혁명이 가져온 기술 혁신에 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와 카를 보슈는 공기 중의 질소를 암모니아로 합성하는 획기적인 방법을 개발했다. 처음에는 전쟁에서 사용할 화약 제조가 목적이었지만, 이 기술은 곧 대량의 질소 비료 생산으로 이어졌고 농업 생산성을 혁명적으로 향상시켰다.
하버-보슈 공정이 없었다면 지구가 부양할 수 있는 인구는 여전히 15억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질소 비료의 대량 생산으로 인해 수용 가능 인구가 80억까지 늘어났다. 오늘날 지구에 살고 있는 82억 명 중 절반 이상이 이 기술 덕분에 생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인구 수용력을 5배 이상 늘린 것이 농업 자체의 발전이 아니라 산업 기술의 혁신이었다는 사실이다. 산업에서의 발명이 인구 구조의 틀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하지만 맬서스의 경고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현재 기후위기 속에서 80억 인구가 선진국 수준의 생활을 유지하려면 지구가 1.6개 필요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우리는 이미 지구의 수용 능력을 60% 초과하여 살고 있는 셈이다. 이는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어떤 면에서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 다만 이번에는 식량이 아니라 환경 자원의 고갈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인구가 많다는 것은 곧 국력이었다. 많은 인구는 높은 생산력과 강한 군사력을 의미했고, 이는 국가의 생존과 번영에 필수적이었다. 산업혁명 이후에도 이 공식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량생산 체제에서는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인구가 많은 국가일수록 경제 성장이 빨랐다. 20세기 내내 인구는 곧 국력이라는 등식이 성립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 AI라는 전혀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AI는 단순히 인간의 노동을 보조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혁명적 기술이다. 이는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과거의 기술 혁신은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켰지만, AI는 인간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이 하버-보슈 공정과 AI의 근본적인 차이다. 전자가 인구 부양력을 늘렸다면, 후자는 인구의 필요성 자체를 감소시킨다.
AI 시대의 생산성 혁명: 인구가 많은 것이 오히려 부담이다
AI 시대에는 전통적인 인구-국력 방정식이 완전히 뒤집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많은 인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국가에 위험 요소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초저출산 현상을 많은 이들이 국가적 재앙으로 보고 있지만, 나는 이것이 오히려 AI 시대에 적응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생산력의 원천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AI 시대에는 생산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휴머노이드 로봇과 AI 에이전트 소프트웨어가 인간보다 더 많은 생산을 해낼 것이다. 2025년 현재, GPT-4와 Claude 같은 대규모 언어모델은 이미 프로그래밍, 글쓰기, 데이터 분석, 창작 활동에서 전문가 수준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이 24시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고, 실수하지 않으며, 감정적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군사력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 군인보다 휴머노이드 로봇, 자율주행 드론, 로봇개가 훨씬 효과적으로 싸울 것이다. 이미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론의 위력이 입증되었고, 미래 전쟁은 인간이 아닌 기계들의 싸움이 될 것이다. 테슬라의 옵티머스,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아틀라스 같은 휴머노이드 로봇은 인간을 훨씬 뛰어넘는 신체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구가 많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인구 감소를 걱정하며 GDP 하락, 군사력 약화를 우려한다. 하지만 이는 본질을 놓치고 겉모습만 보는 것이다. 인구가 중요했던 이유는 그들이 생산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군인이 필요했던 것도 결국 전투라는 ‘생산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본질은 항상 생산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생산을 AI와 로봇이 더 잘할 수 있다면?
AI 에이전트는 벌써 지식노동 분야에서 인간의 생산성을 빠르게 따라잡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현재 업무의 25%가 AI로 완전 자동화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맥킨지는 203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4억~8억 개의 일자리가 자동화로 사라질 것으로 예측한다. 이는 전체 노동력의 15~30%에 해당하는 충격적인 숫자다.
AI 기술이 등장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이 정도의 파급력을 보인다면, 10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 휴머노이드 로봇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 지식노동뿐 아니라 육체노동의 생산성도 인간을 압도할 것이다. 엘론 머스크는 2040년까지 휴머노이드 로봇의 수가 인간을 초과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과장된 전망일 수도 있지만, 방향성은 분명하다.
현대 경제에서 생산성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되고, 이를 합친 것이 GDP다. 인간이 차지하는 생산 비중이 AI와 로봇에 비해 점점 줄어든다면, 인간 노동의 경제적 가치도 하락할 수밖에 없다. 이미 많은 기업들이 AI 도입으로 인건비를 절감하고 있다. IBM은 AI로 대체 가능한 7,800개의 일자리를 채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에이전트와 휴머노이드가 생산을 담당하게 되면 인간의 일자리는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일자리를 갖지 못하는 무노동 계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내 예측으로는 30년 후 인구의 10%만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나머지 90%는 일하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인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인구는 경제적으로 부양해야 할 부담일 뿐이다. 산업시대에는 잉여 노동력도 예비군 역할을 했지만, AI 시대에는 그마저도 필요 없다. 오히려 실업자가 늘어날수록 사회 불안이 커지고 복지 비용이 증가한다.
싱가포르와 스위스 같은 소규모 선진국들이 AI 시대에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적은 인구로도 높은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고, 사회 통합도 용이하며,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인도나 나이지리아 같은 인구 대국들은 AI 시대에 더 큰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무노동 시대의 새로운 사회계약: 기본소득과 산아제한
그렇다면 일하지 않는 90%의 인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전통적 윤리관으로는 이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다. 새로운 사회계약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미 여러 국가에서 이에 대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주 4일제, 주 4.5일제 도입은 줄어드는 일자리를 더 많은 사람이 나눠 갖기 위한 시도다. 아이슬란드는 2015~2019년 대규모 실험을 통해 근무시간을 주 40시간에서 35~36시간으로 줄였지만 생산성은 오히려 향상되었다. 현재 아이슬란드 노동인구의 86%가 단축 근무를 하고 있다.
기본소득제는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핀란드는 2017~2018년 2천 명의 실업자에게 월 560유로를 조건 없이 지급하는 실험을 했다.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수급자들의 정신건강이 개선되었고, 구직 활동도 더 적극적으로 했다. “공짜 돈을 주면 게을러진다”는 우려는 기우였다.
케냐에서는 더 야심찬 실험이 진행 중이다. 2만3천 명을 대상으로 12년간 기본소득을 지급하며 그 효과를 연구하고 있다. 중간 결과를 보면 수급자들의 사업 시작 비율이 높아졌고, 교육과 건강에 대한 투자도 늘었다. 스페인은 2020년부터 최소생활소득제를 도입해 100만 가구를 지원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 각국 정부가 뿌린 재난지원금도 일종의 기본소득 실험이었다. 미국은 성인 1인당 최대 3,200달러를 지급했고, 한국도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했다. 이런 경험들이 본격적인 AI 시대를 대비한 예행연습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일하는 10%와 AI가 나머지 90%를 부양해야 하는 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결국 인구 자체를 줄이는 것이 더 현실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과거 중국의 한 자녀 정책처럼 국가가 직접적으로 산아를 제한하는 정책이 다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인권 문제로 논란이 되겠지만, AI 시대의 경제적 압박이 커질수록 이런 극단적 조치를 고려하는 국가들이 나타날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기술 혁신은 항상 사회 구조의 변화를 가져왔다. 1800년대 산업혁명은 농업사회를 공업사회로 바꿨고, 이 과정에서 교육 시스템도 산업 일꾼을 양성하는 방향으로 재편되었다. 표준화된 교과과정, 정해진 시간표, 규율과 복종을 강조하는 학교 시스템은 모두 공장에서 일할 노동자를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19세기 초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은 오늘날 AI에 대한 우려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숙련 직물공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방직기를 파괴했다. 정부는 기계 파괴를 사형죄로 규정하며 강경 진압했고, 많은 노동자가 처형되거나 호주로 유배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 반대한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기술 발전의 혜택이 자본가에게만 돌아가는 불공정한 구조였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조합이 합법화되고, 공장법이 제정되어 노동시간이 규제되었으며, 사회보장제도가 도입되었다. 1833년 영국 공장법은 9세 미만 아동의 공장 노동을 금지했고, 1847년에는 여성과 아동의 노동시간을 하루 10시간으로 제한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주 5일제, 최저임금제, 실업보험 등이 보편화되었다.
AI 시대에도 비슷한 과정을 거칠 것이다. 처음에는 혼란과 저항이 있겠지만, 결국 새로운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술 발전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 혜택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기본소득, 로봇세, 데이터 배당금 같은 새로운 제도들이 21세기의 노동법과 사회보장제도가 될 것이다.
다만 AI 혁명의 속도는 과거 산업혁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산업혁명은 100년 이상 걸렸지만, AI 혁명은 수십 년 만에 완성될 것이다. 이는 적응할 시간이 그만큼 짧다는 의미다. 러다이트들은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일자리를 잃었지만, 현대의 노동자들은 불과 몇 년 만에 실업자가 될 수 있다.
초특급 엘리트가 이끄는 미래: AI를 통제할 인간은 누구인가
AI 시대에도 모든 인간이 쓸모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극소수의 초엘리트는 과거보다 훨씬 더 중요해질 것이다. 이런 좋은 일꾼에 대한 개념, 이런 일꾼을 만드는 교육에 대한 개념이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다. 단순히 바뀌는 것이 아니라, 더욱 특별하고 탁월한 인재를 만들기 위해 교육의 패러다임 자체가 혁명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과거 산업시대에는 한 명의 유능한 경영자가 수만 명의 노동자를 이끌었다. 헨리 포드는 자동차 공장에서 10만 명을 고용했고, 앤드루 카네기는 제철소에서 수만 명을 관리했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AI 시대에는 한 명이 1000만 명, 아니 1억 명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마크 저커버그는 30억 명이 사용하는 플랫폼을 운영하고, 샘 알트만은 수억 명이 사용할 AI를 개발한다.
문제는 AI에 대한 통제권이다. 인간이 AI보다 능력이 떨어진다고 해서 AI에게 모든 결정권을 넘길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다. 인간은 자율성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AI를 설계하고, 목표를 설정하고, 윤리적 기준을 정해야 한다. 이를 담당할 초엘리트 계층의 역량이 인류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현재 AI 개발을 주도하는 것은 극소수의 천재들이다. OpenAI, DeepMind, Anthropic 같은 선도 기업들의 핵심 연구진은 각각 수백 명에 불과하다. 이들이 만든 AI가 수십억 명의 삶을 바꾸고 있다. 앞으로 이런 집중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AI를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격차는 인류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수준에 이를 것이다.
이런 초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 시스템의 변화는 불가피하다. 현재의 표준화된 대중교육으로는 AI를 다룰 인재를 기를 수 없다. 개인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맞춤형 교육,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를 기르는 교육, 다학제적 접근을 강조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이미 실리콘밸리의 엘리트들은 자녀를 일반 학교가 아닌 특별한 교육 기관에 보내고 있다. 칸랩스쿨, 알트스쿨 같은 혁신 학교들은 AI를 활용한 개인화 학습, 프로젝트 기반 학습, 기업가정신 교육을 제공한다. 학생들은 정해진 교과서를 따르는 대신 자신의 관심사를 깊이 탐구하고,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을 쌓는다.
하지만 이런 엘리트 교육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대다수는 여전히 19세기식 교육 시스템에 갇혀 있다. 이는 AI 시대의 계층 고착화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부모의 경제력과 안목이 자녀의 미래를 결정하는 세습 사회가 될 위험이 크다.
또한 AI를 통제하는 초엘리트들의 윤리적 자질이 매우 중요해진다. 그들의 결정이 수십억 명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술적 역량만으로는 부족하다. 인문학적 소양, 철학적 사고, 윤리적 판단력을 갖춘 전인적 리더가 필요하다.
플라톤이 말한 ‘철인왕’의 AI 시대 버전이 필요한 것이다. 고대 아테네에서 철인왕이 철학적 지혜로 도시국가를 다스렸다면, AI 시대의 철인왕은 알고리즘과 데이터의 바다에서 인간성의 나침반을 잃지 않는 자들이어야 한다. 그들은 마치 AI라는 거대한 두뇌와 인간이라는 심장을 동시에 가진 켄타우로스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기계의 논리를 이해하면서도 인간의 가치를 수호하고, 0과 1의 디지털 세계에서도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으며, 알고리즘의 효율성과 인간의 존엄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현자들이어야 한다. 대중이 AI의 편리함과 효율성에만 매료되어 있을 때, 이들은 그 이면에 숨겨진 위험과 기회를 모두 꿰뚫어 보며 인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현실을 직시하면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대다수가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하고, 극소수만이 의미 있는 일을 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항상 위기의 순간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두려움에 주저앉는 사람들보다, 위험을 알면서도 도전하는 개척자들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왔다.
당신과 당신의 자녀는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변화를 거부하고 과거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할 것인가? AI 시대의 초엘리트가 되는 길은 험난하다. 평생 학습해야 하고, 끊임없이 혁신해야 하며,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그 길을 걷는 것만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주저앉아 기본소득에 의존하며 살기보다는, 죽을 각오로 도전하여 인류의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 더 가치 있지 않을까?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 발자국이 다음 세대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기술적 특이점(Singularity)의 도래를 예측한다. AI가 인간의 지능을 완전히 초월하는 순간, 그 이후의 미래는 예측 불가능해진다. 레이 커즈와일은 2045년경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으로 본다. 일부 전문가들은 더 이른 시기를 예상한다. 2030년대에 AGI(범용인공지능)가 등장하고, 그 후 급속도로 초지능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가능성도 열려 있다. 이미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는 뇌에 칩을 이식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들이 나타날 것이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유전자 편집, 나노기술 등이 결합되어 인간의 능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
이런 급진적 변화 앞에서 전통적인 인구 개념은 의미를 잃는다. 한 명의 증강된 인간이 수백만 명의 일반인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인구의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더 정확히는, 인간이 기계와 어떻게 공진화할 것인가의 문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AI가 인간을 완전히 대체하여 인류가 멸종할 수도 있고, 극소수 엘리트가 AI를 독점하여 나머지를 노예화할 수도 있다. 환경 파괴와 자원 고갈로 문명이 붕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관론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가능성만 높아진다.
결국 AI 시대의 인구 문제는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 존재의 의미, 사회의 구조, 문명의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과거에는 “한 행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얼마나 강력한 AI를 통제하여 인류를 넘어선 우주적 차원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가?”가 핵심 질문이 되었다. 한 명의 초엘리트가 AI와 결합하여 행성 전체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른 생명체와의 공존을 모색하며, 우주 진출의 길을 개척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맬서스가 인구론을 쓴 지 200년이 넘었다. 그의 예언은 빗나갔지만, 인구와 자원의 균형이라는 근본 문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AI 시대에는 그 균형점이 완전히 달라질 뿐이다. 더 적은 인구로도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더 적은 자원으로도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다. 문제는 그 혜택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가 아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인구를 200억, 300억으로 늘려도 달성할 수 없는 천문학적 생산성을 AI를 통해 실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더 많은 인구가 더 많은 생산을 의미했지만, 이제는 적은 인구와 강력한 AI의 결합이 인류 역사상 상상할 수 없었던 수준의 가치 창출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인류는 항상 한계를 뛰어넘으며 진화해왔다. 산업혁명이 수공업의 시대를 끝내고 대량생산의 시대를 열어 인류를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켰듯이, AI 혁명은 인간 노동의 한계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생산성의 시대를 열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일자리 감소나 정체성의 혼란을 걱정하지만, 이는 나비가 되기 위해 애벌레가 껍질을 벗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다. 개인의 순간적 불편함에 집착하는 것은 인류 전체의 거대한 도약을 놓치는 근시안적 사고다.
AI 시대는 인류가 지구라는 작은 행성의 제약에서 벗어나 우주적 존재로 진화하는 결정적 계기다. 한 명의 초엘리트가 AI와 결합하여 과거 수십억 명이 해낼 수 없었던 일을 순식간에 이뤄낼 것이다. 인구가 힘이었던 원시적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AI를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극소수의 천재들이 인류의 운명을 좌우하며, 그들의 창의성과 비전이 종 전체를 다음 단계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그 천재는 바로 당신이거나 당신의 자녀일 수도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도약의 주인공이 될 기회가 지금 당신 앞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