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인간의 공진화: 물병에서 시작된 AI의 탄생과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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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병과 인간의 진화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 털이 거의 없는 원시 인류 사냥꾼이 가쁜 숨을 내쉬며 초원을 달립니다. 그의 등에는 동물 가죽으로 만든 물주머니가 매달려 있고, 사냥감은 지쳐가지만 그는 멈추지 않습니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체온을 식힐 수 있는 덕분에, 사자나 하이에나처럼 그늘에 숨지 않고도 한여름 대낮에 사냥을 계속할 수 있었지요. 이렇게 “땀을 흘려 체온을 조절하는 능력”은 인간 조상의 진화에 큰 도약이 되었습니다 . 그러나 땀으로 체온을 유지하는 대가로 탈수라는 문제가 뒤따랐습니다. 실제 고인류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호모 하빌리스 같은 초기 인류는 무더운 날 몇 시간만 움직여도 3리터에 달하는 땀을 흘렸다고 합니다 . 숲에서 과일을 먹으며 지낼 때는 수분 섭취가 자연스럽게 되었지만, 탁 트인 사바나에서는 더 이상 부족한 과일만으로는 수분을 보충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휴대용 물병”이라는 혁신이었습니다. 원시 인류는 지능과 도구 제작 솜씨를 발휘해 물을 담아 나를 수 있는 용기를 고안해냈습니다. 물론 가죽 부대를 비롯해 바가지나 속을 파낸 호리병박, 심지어 타조 알껍질까지 그 형태는 다양했겠지요. 이러한 최초의 물통들은 유기물로 만들어졌기에 화석으로 남아있지 않지만, 인류가 먼 거리를 이동하며 물을 운반할 수 있게 해 준 결정적인 발명이었습니다 . 현생 아프리카 부시맨들이 타조 알껍질에 물을 담아 땅속에 묻어두고 이동 경로마다 숨겨놓는 전통도, 그 시절부터 이어져 온 지혜의 흔적일 것입니다 .
물을 저장하고 운반할 수 있게 된 덕분에, 우리의 조상은 더 이상 물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못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땀을 흘려 한낮에 달릴 수 있는 능력과, 그 땀으로 잃은 수분을 보충할 수 있는 문화가 결합하면서 인류는 아프리카의 넓은 사바나를 장거리 이동하며 사냥하는 독특한 포식자가 됩니다. 대부분의 동물이 45℃를 넘나드는 한낮에는 그늘에서 숨을 고르고 황혼이나 밤에 활동하는 반면 , 인류 조상은 태양 아래 땀을 식히며 활동 영역을 넓혔습니다. 실제로 두 발로 서서 걷는 자세와 머리 위의 약간의 머리카락만 남긴 인체 구조는 직사광선에 노출되는 몸 면적을 줄이고 바람에 쉽게 식을 수 있게 해 주어 이러한 사냥에 더욱 유리했다고 합니다 . 사막 같이 건조한 환경에서도 식량과 물을 찾아 세대를 거듭해 이동한 끝에, 불과 수천 년 만에 수천 킬로미터 밖까지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는 분석도 있지요 . 결국 “땀 흘리며 달리는 인간”의 탄생 배경에는 물병이라는 문화적 도구가 자리했고, 이는 인간의 신체를 털 없는 땀쟁이로 변화시키는 진화 압력의 한 축이 되었습니다.
불과 요리의 혁명
밤이 찾아온 원시의 대지 위에서, 한 무리의 인류는 모닥불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모여 있습니다. 갓 잡은 동물 고기를 불에 구워 나눠 먹고, 불꽃 주변에 둘러앉아 서로의 그림자가 춤추는 것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맨 처음 우연히 번개로 생긴 불씨를 이용해 고기를 익혀 먹었을 때, 아마 입안 가득 퍼지는 고소한 향에 모두가 놀랐을 겁니다. 그러나 불을 통한 요리는 맛의 혁명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몸을 서서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익힌 고기와 채소는 날것보다 부드럽고 소화하기 쉬워서, 음식을 먹는 데 들어가는 노력과 시간, 그리고 소화에 드는 에너지를 크게 줄여주었지요 .
요리의 등장으로 얻게 된 잉여 에너지는 고스란히 인간의 두뇌와 신체 발달에 쓰였습니다. 우리가 먹은 음식을 통해 얻는 칼로리의 4분의 1은 뇌가 소비하는데요 , 날것의 음식을 씹고 소화하느라 하루의 절반을 보내야 했다면 그렇게 에너지가 많이 드는 큰 뇌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실제로 하버드 대학의 생물인류학자 리처드 랭엄(Richard Wrangham)은 “불에 익혀 먹는 음식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열쇠”라고 주장합니다 . 그는 불의 사용으로 호모 에렉투스 시절에 이르러 인류 조상의 뇌 용량이 획기적으로 커지고, 반면 장과 치아, 턱은 작아졌다는 점에 주목하지요 . 실제로 약 180만 년 전 등장한 호모 에렉투스의 화석을 보면, 이전 조상들에 비해 체구와 뇌 용량은 커졌지만 치아 크기와 턱뼈는 현저히 줄어들어 있습니다 . 이는 딱딱한 생식을 씹는 데 필요한 거대한 턱근육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불에 구운 고기와 뿌리식물은 말랑하여 작은 치아로도 충분히 씹을 수 있었고, 영양소 흡수율이 높아져 짧은 창자로도 효율적인 소화가 가능해졌지요 .
불을 다룬 이후 “요리하는 인간”은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하루 종일 음식을 찾아 헤매고 씹지 않아도 되자, 무리 내에서 분업과 협력의 여지가 생겼습니다 . 불가 주변은 자연스레 공동 식사와 소통의 장이 되었고, 서로 음식을 나누는 문화가 싹텄습니다. 일부 연구자는 이 과정에서 가족 단위 생활과 남녀 협력이 강화되었다고까지 말합니다 . 즉, 남성은 사냥 등 바깥활동에 전념하고 여성은 불 지피고 식재료를 손질하며 아이를 돌보는 식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불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의 측면이지만, 결국 이러한 생활 방식이 안정적으로 지속되면서 인류는 점점 더 요리에 적합한 신체로 진화해 갔습니다. 현대 인류는 태어나서 불에 조리한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들 정도로 신체가 요리에 적응해버렸습니다. 가령 우리 턱과 치아는 여전히 침팬지나 초기 인류에 비해 약하고 작아서, 날고구마나 생고기를 잔뜩 먹고도 충분한 칼로리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결국 불을 길들여 음식을 익혀 먹는 문화가 우리의 해부학적 구조마저 바꾸어 놓은 것이죠.
농업 혁명이 가져온 몸의 변화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이제 인류는 더 이상 하루하루 떠돌아다니며 먹이를 찾지 않기로 합니다. 만물이 싹트는 강가에 정착해 씨를 뿌리고 가꾸는 법을 배우면서, 농경 사회의 막이 올랐습니다.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혁명적인 전환인 신석기 시대 농업의 시작은 우리의 삶을 영원히 바꿔놓았습니다. 곡식 창고를 채우고 가축 우리를 지키는 농부의 생활은 겉보기엔 이전의 수렵채집 생활보다 안정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착 생활과 곡물 중심 식단은 우리의 골격과 치아, 그리고 건강에 새로운 도전을 안겨주었습니다.
먼저, 우리의 턱과 치아부터 변화를 겪었습니다. 사냥 사회의 조상들은 거친 나무열매, 생고기, 뿌리 등을 생으로 씹어 먹었기 때문에 넓고 강한 턱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이러한 턱은 풍부한 공간에 치아가 가지런히 들어맞아, 현대인처럼 치아 배열이 삐뚤거나 사랑니가 날 자리 부족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농경이 시작된 후 인류의 식단은 부드러운 곡물죽, 익힌 콩과 식물 등 소프트 푸드 위주로 바뀌었습니다. 딱딱한 것을 오래 씹을 필요가 적어지자 턱뼈는 점차 작아지고 약해지는 방향으로 바뀌었지요. 하지만 치아의 크기와 개수는 단기간에 크게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에, 작은 턱에 여전히 동일한 숫자의 치아가 나다 보니 공간 부족으로 인한 치아 겹침과 부정교합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농경 초기 농부들의 두개골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약 1만 2천 년 전부터 인류의 아래턱뼈 모양이 복잡한 변화를 겪었고 전반적으로 크기가 감소한 반면 치아 크기는 크게 줄지 않아 오늘날 흔한 치열 문제의 시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농사짓는 문화가 “치과 교정기”의 탄생 배경이 되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올 정도입니다.
골격 역시 변화했습니다. 비교적 안정된 정착 생활은 인류의 신체 활동량 감소를 불러왔습니다. 사냥꾼 시절에는 매일 장거리 이동과 고강도 활동을 해야 했지만, 농부들은 한 지역에서 반복적인 일(쟁기질, 수확 등)은 해도 이동 범위나 활동 종류는 단순해졌습니다. 그 결과 뼈에 가해지는 자극이 줄어들면서 뼈의 밀도와 강도도 낮아지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 실제 연구에서는 신석기 초기 수렵채집인의 뼈는 오랑우탄에 필적할 만큼 단단하고 밀도가 높았는데, 같은 지역 후대의 농경인 뼈는 훨씬 가볍고 부러지기 쉬운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고 합니다. 뼈 질량 약 20% 감소라는 결과는, 현대 우주인이 무중력 상태에서 3~4달 지냈을 때 잃는 골량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하니 그 차이가 실감되지요. 연구자들은 “앉아서 지내는 생활양식이 인류 골격 약화를 불러왔다”고 결론짓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뼈의 취약화 현상은 현대에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고 지적합니다. 즉 농경 시대보다 산업화된 현대 사회에서 신체 활동이 더욱 줄어들어, 인류의 골밀도는 역사상 최저 수준에 다다르고 있다는 경고입니다. 문화가 바꾼 생활 방식이 해부학적 구조까지 바꾸어놓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겠지요.
농경 사회는 식습관뿐 아니라 인구 밀집과 환경도 크게 바꾸었습니다. 작은 무리로 떠돌아다니던 시절과 달리,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이 모여 사는 마을과 도시가 생겨났습니다. 사람과 가축이 한 공간에서 지내고, 배설물이나 음식 쓰레기가 주변에 쌓이기 시작하면서, 전에는 없던 세균과 바이러스들이 인간 사회에 등장했습니다. 소, 돼지, 닭 등 가축에게서 옮은 전염병과 많은 사람이 밀집해 퍼진 유행병들이 인류를 괴롭혔지요. 농업 혁명 이후 인류는 전염병과의 전쟁을 치러야 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면역체계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컨대 농경 사회에서는 인구가 급증하면서 천연두나 홍역처럼 한 번 돌기 시작하면 모든 마을 사람에게 번질 수 있는 새로운 질병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질병에 내성을 갖는 유전자를 지닌 사람만이 살아남아 자손을 남기는 식의 자연선택이 인류 유전체에 일어났지요. 실제로 과학자들이 고대 인류의 DNA를 분석한 연구를 보면,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 전환된 뒤 면역 관련 유전자에 변화가 생긴 흔적이 발견됩니다. 한 연구에서는 신석기 시대 농부들의 유전자 변이를 분석한 결과 인구 밀도가 높아지던 시기에 면역계와 관련된 유전자들이 빠르게 진화했음을 밝혀냈습니다. 이는 가축과 가까이 지내며 발생한 질병 환경에 적응한 결과로 보입니다. 또한 농경 사회의 곡물 위주 식단은 이전보다 영양소 구성이 단순했기에, 이를 보완하기 위한 대사 관련 유전자 변화도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면, 글루텐이 함유된 밀이나 보리를 주식으로 삼은 집단에서 셀리악 병(글루텐 불내증)과 관련된 유전자의 변이가 발견되는데, 이것이 곡물 식단에 대한 부작용적 대가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런 문화적 변화가 불러온 생물학적 진화의 사례들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환경에 맞추어 자신의 몸을 재설계해온 오랜 역사를 보여줍니다.
유제품 소비와 유전자 진화
농경 생활이 자리잡은 후, 인류는 새로운 식량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동물들을 적극적으로 길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젖소, 염소, 양 등의 가축을 길들이면서 인류는 전에 없던 귀한 영양원을 얻게 되었지요. 바로 우유입니다. 그러나 야생 포유류의 일반적인 생리를 따르자면, 어른이 된 인간은 더 이상 젖을 소화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기 때는 누구나 젖당(락토스)을 분해하는 효소를 만들지만, 성인이 되면 우유를 마셔도 설사를 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였습니다. 실제로 전 세계 인구의 약 3분의 2는 성인이 되면 유당불내증이 있어 우유를 그대로 마시면 배탈이 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전 세계 일부 지역의 인류 집단에서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유당을 분해할 수 있는 능력, 즉 락타아제 지속성을 지닌 사람들이 다수 존재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그 해답은 유제품을 즐기는 문화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유를 얻을 수 있는 가축을 기르는 목축 문화가 자리잡은 집단에서는 우유를 음식으로 활용하는 방식이 발전했습니다. 초창기에는 성인이 우유를 마시면 탈이 나기 때문에, 우유를 바로 마시기보다는 치즈나 요구르트처럼 발효를 시켜서 먹었습니다. 발효 과정에서 유당이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므로, 락타아제가 없는 사람도 어느 정도 유제품을 섭취할 수 있었지요 . 하지만 발효를 거치면 우유 속 칼로리의 상당 부분이 소모되어버린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 만약 우유를 있는 그대로 마실 수만 있다면, 같은 양의 우유로 약 30% 더 많은 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습니다 . 과거 식량이 귀했던 환경에서는 이것이 엄청난 이득이 되었겠지요. 실제로 과학자들이 인류의 유전자 변화를 추적한 결과, 최근 몇 천 년 사이에 성인도 락타아제를 계속 생산하게 하는 유전자 변이가 유럽, 중동, 아프리카 등 서로 다른 지역에서 최소 다섯 번이나 독립적으로 발생하여 퍼져나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만 년 전만 해도 이러한 성인 락타아제 지속성 유전자는 인류에게 전혀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전 세계 성인의 약 3분의 1이 그 능력을 갖게 되었을 정도로 불과 만여 년 사이에 급격한 진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눈부신 속도의 진화는 문화와 자연선택이 맞물린 대표적 사례입니다. 예를 들어 북유럽인들의 경우 거의 95%에 가까운 성인이 우유를 소화할 수 있는데 , 이는 추운 기후에서 농사가 어려운 환경에서 목축을 통해 얻은 우유로 생존을 이어온 역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유를 마실 수 있었던 조상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추운 겨울을 버티는 데 유리한 칼로리와 영양을 얻었고, 그 결과 더 많은 자손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동아프리카의 일부 유목민 사회에서도 비슷한 진화가 일어났는데, 가축 피와 섞은 우유를 주식으로 삼는 문화에 적응하여 성인 락타아제 지속성이 높은 빈도로 나타납니다. 재미있게도, 서로 전혀 교류가 없던 유럽과 아프리카의 목축민들이 각기 다른 돌연변이 경로를 통해 같은 결과로 진화했다는 점은, 문화가 제시한 환경 압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유를 마시는 능력은 이제 더 이상 서구나 목축민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인류 집단 간 차이는 큽니다. 동아시아인의 경우 대부분이 유당불내증이고, 한국인도 성인의 절반 이상이 우유를 소화 못 한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로 집단차가 뚜렷합니다 . 이는 과거 조상들의 문화적 식생활 차이가 오늘날 유전자의 차이로 이어진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유를 마시는 문화”가 있었던 곳에서는 유전적 적응까지 뒤따랐던 것입니다.
산업혁명과 근대화가 남긴 흔적
18세기 이후 인류는 다시 한 번 거대한 변화를 맞이합니다.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기술과 사회의 급변 속에서, 사람들의 생활 양식은 농경 사회와는 또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증기 기관이 돌고 기계가 생산을 도우면서, 많은 인구가 농촌을 떠나 도시의 공장과 사무실에 모여들었습니다. 기계 앞에 오래 앉아 일하는 생활이 보편화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전기와 교통이 발달하고 식량 생산성과 의료 수준이 향상되면서, 사람들의 영양 상태와 위생도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들은 인간의 평균 신장과 체형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선, 평균 키의 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산업혁명 초기에는 도시 노동자들의 빈곤과 영양 부족으로 건강 상태가 오히려 악화되는 면도 있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공장 지대 노동자나 개발도상국 초기 산업화 시기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환경으로 평균 신장이 농촌 인구보다 작았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1920세기를 거치며 전 세계 인류의 평균 신장은 크게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특히 20세기 동안 급격한 상승이 있었는데, 이는 영양 개선과 보건 환경 향상의 성과로 해석됩니다 . 예컨대 영국에서는 지난 100년간 평균 키가 약 10cm 정도 커졌고, 일부 국가(네덜란드나 한국 등)에서는 평균 15~20cm에 이르는 신장 증가가 관찰되었습니다 . 우리나라의 경우도 산업화 이전 세대인 1960년대 남성 평균 키가 160cm대 초반이었으나, 2020년대에는 170cm 중반에 달할 정도로 두 세대 만에 큰 폭으로 자랐습니다. 이렇듯 충분한 칼로리와 단백질 섭취, 어린 시절 질병 감소 등 문화와 환경의 발전이 유전자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인류의 신체적 성장 가능성을 극대화한 것이지요 .
하지만 키가 커지고 수명이 길어지는 긍정적 변화 이면에, 산업화된 생활 방식은 새로운 신체적 부담을 주기도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운동 부족과 좌식 생활에 따른 변화입니다. 현대인은 책상 앞에 앉아 보내는 시간이 전례 없이 많습니다. 하루 종일 밭을 갈거나 사냥을 다니던 조상들과 달리, 컴퓨터나 기계를 다루는 직업인이 대다수인 사회에서는 근골격계에 가해지는 자극이 단조롭고 약해지기 쉽습니다. 그 결과 뼈와 근육은 필요 이상으로 발달하지 않은 상태로 남기 쉬워졌고, 이는 앞서 말한 골밀도 저하 추세를 가속화했습니다. 한편, 장시간의 좌식 작업은 자세의 문제도 야기했습니다. 오랜 시간 의자에 앉아 있거나 고개를 숙이고 일을 하면 척추에 무리가 가서 목과 허리가 굳거나 만성 통증을 겪는 사례가 급증했습니다. 실제로 현대인들에게 흔한 거북목 증후군이나 허리디스크 같은 질환은 사냥꾼이나 농부 시절에는 드물었을 현대병일 것입니다. 산업화 이후로 사람들이 점차 구부정한 자세로 생활하게 되면서, 목뼈가 앞으로 굽는 체형적 변화마저 진행되고 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아직 유전자적 진화라고 하긴 어렵지만, 신체 기능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문화의 영향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또 다른 변화로는 식생활의 서구화와 과잉 영양을 들 수 있습니다. 산업화와 함께 대량 생산된 값싼 음식, 정제된 곡물과 설탕의 범람은 우리의 체지방 축적 양상에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과거 부족한 칼로리를 아껴 쓰던 몸은 풍요 속에서 오히려 비만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비만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현상은, 문화가 신체에 영향을 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물론 비만 자체는 유전적 변화라기보다는 환경 변화에 대한 생리적 반응이지만, 최근 연구들은 과도한 영양 섭취가 이어지면 후성유전적 변화로서 대사증후군에 취약한 경향이 다음 세대에 전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합니다. 또한 높은 설탕과 나트륨 섭취는 성인병과 만성 질환의 증가로 이어졌고, 인류는 다시 이에 적응하고자 약물과 의료라는 문화적 해법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산업화와 근대화로 인한 생활 방식 변화는 이처럼 인간의 평균적인 체격, 건강상의 특징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우리 몸은 거기에 맞춰 시시각각 변화하거나 대처해나가고 있습니다.
현대 디지털 환경과 신체 변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인류는 디지털 혁명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기들은 우리의 생활상을 또 한 번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어린아이부터 노년층까지 하루 대부분을 스크린 앞에서 보내는 시대가 되자, 우리의 감각 기관과 움직임에도 미묘한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우선 시각 환경의 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 모니터 등 가까운 거리의 밝은 화면을 장시간 응시하는 생활습관은 눈의 초점 조절 체계에 큰 부담을 줍니다. 동시에 실외에서 멀리 보는 활동과 자연광 노출이 줄어들면서, 전 세계적으로 근시 인구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열이 높고 디지털 기기 보급률이 높은 동아시아의 경우 그 현상이 두드러져, 한국·중국·일본 등 일부 도시 지역 젊은 층에서는 근시 비율이 80~90%에 이를 정도라는 보고도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 청소년 10명 중 8~9명이 안경을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근시는 현대인의 새로운 “표준”이 되어버렸습니다. 불과 한두 세대 전만 해도 전체 인구의 20~30% 정도만이 근시였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이지요. 유전적으로 인류의 눈 구조가 그렇게 빠르게 바뀌었다기보다는, 디지털 환경과 실내 생활이라는 문화적 변화가 시각 발달에 영향을 미쳐 나타난 현상입니다. 물론 아직은 일시적인 환경 영향으로 보는 것이 맞겠지만, 근시로 인해 안구 모양이 길어지는 경향이 누적되고 심화된다면 아주 먼 미래에는 인류의 평균 안구 형태가 달라지는 진화적 결과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도 어린 나이부터 두꺼운 안경을 쓰는 아이들이 늘면서, 눈 건강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문화(예: 실외 활동 장려, 스크린 타임 제한 등)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손과 손가락의 사용 방식도 디지털 시대에 크게 바뀐 부분입니다. 스마트폰이 없는 일상을 상상하기 어려워지면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번씩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하고 스와이프합니다. 특히 양손 엄지손가락을 빨리 움직여 문자 메시지를 입력하는 동작은, 불과 20년 전만 해도 누구도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활동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우리의 뇌가 이러한 손의 사용 패턴 변화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스마트폰 터치스크린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일수록 대뇌 피질에서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 감각을 담당하는 부분의 활동이 더 증강되어 있다고 합니다 . 즉 뇌가 손가락을 쓰는 새로운 습관에 맞추어 스스로 연결을 강화하고 재구성하는 것이죠. 불과 열흘 간의 스마트폰 집중 사용 이력이 뇌파 검사 결과에 반영될 정도로, 우리의 뇌는 디지털 기기 사용에 따라 매일매일 지문 패턴이 바뀌듯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인류의 뇌신경 가소성이 얼마나 유연한지 보여주는 동시에, 장기적으로 문화적 도구가 신체 감각 체계까지 변모시킬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스마트폰 이전 세대 사람들과 이후 세대 사람들의 뇌 손가락 지도가 다르게 그려지고 있다는 말이지요. 과거에 바이올린 연주자의 뇌에서 현을 누르는 손가락 부위가 발달한다는 연구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스마트폰 세대 전체의 뇌구조가 미시적으로나마 달라지고 있는 셈입니다 .
하지만 이런 긍정적일 수 있는 적응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디지털 기기 과사용의 부작용도 우리 몸에 축적되고 있습니다. 특히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거북목”이라 불리는 머리 전방위치 증후군입니다. 스마트폰을 볼 때 대부분 고개를 앞으로 길게 빼고 아래로 숙이기 때문에, 목뼈의 커브가 비정상적으로 변형되고 목 근육에 만성 부담이 가게 됩니다. 컴퓨터 앞에 장시간 앉아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나쁜 자세를 유발해 척추 정렬을 무너뜨립니다. 그 결과, 만성적인 목·어깨 통증과 허리 통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이 늘어났고, 심지어 청소년층에서도 척추측만증이나 목 디스크 증상이 예전보다 흔해졌습니다. 이러한 근골격계 이상은 단순한 통증을 넘어 평형감각 및 운동능력 저하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한 연구에서는 거북목 상태의 사람들은 한 발로 균형 잡고 설 때 흔들림이 더 크다는 결과를 내기도 했지요. 요컨대 스마트폰과 컴퓨터 중심의 생활이 우리의 자세와 움직임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졌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의자나 스탠딩 책상, 목 받침대 등이 등장하고, 스트레칭 문화가 장려되는 등 새로운 적응 노력이 진행 중입니다. 디지털 환경에 적합하도록 우리 몸을 보호하고 변화시키려는 문화적 대응이 또 시작된 셈입니다.
AI와 인간의 미래 진화
마지막으로, 이제 막 서막이 오른 인공지능(AI) 시대를 상상해봅시다. 인공지능 기술은 우리의 사고방식과 생활 양식에 지대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AI는 과연 인간의 미래 진화에도 영향을 미칠까요? 아직 확실한 답은 없지만, 현재의 추세와 가능성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시나리오를 그려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외주화되는 두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AI가 우리의 많은 정신 노동을 대신해 준다면, 먼 미래에 인간의 뇌 용량이나 구조에도 변화가 올지 모릅니다. 이를테면 지금도 내비게이션에 길 찾기를 맡기고, 계산기를 이용하며, 기억할 것은 전부 디지털 메모리에 저장해두는 시대입니다. 인간은 점점 생각하고 암기하는 일을 기계에 의존하고, 스스로는 더 창의적이고 고차원적인 일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대부분의 인지 작업을 AI가 처리하게 된다면, 우리 뇌는 그에 맞추어 에너지 소비를 최적화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진화생물학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기관은 퇴화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실제로 최근 몇만 년 사이에 인류의 평균 뇌용량이 약간 감소해왔다는 연구도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를 인류의 자기-길들이기 현상과 연관짓습니다. 가령 가축 동물들은 야생 조상에 비해 뇌가 작아지는 경향이 있는데, 인류도 사회가 복잡해지며 공격성은 낮추고 협동성을 높이는 쪽으로 자기 스스로를 길들이는 과정에서 약간의 뇌 축소가 일어났을 가능성을 제기하지요. 마찬가지로 AI의 보조에 익숙해진 미래 인간은 뇌의 일부 기능을 덜 활용하게 되어 뇌 구조나 크기에 변화가 올 거라는 예측이 있습니다 . 실제 학술지에 발표된 한 논문은 AI 시대가 지속될 경우 인간 뇌의 크기가 더 작아지는 최근 경향이 가속화될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 물론 뇌 크기가 곧 지능 저하는 아니며, 오히려 효율화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하는 힘”의 상당 부분을 기계가 떠맡게 될 때 인간 뇌가 어떠한 길을 걷게 될지는 흥미로운 상상력의 영역입니다.
둘째로, AI와 함께 사는 삶이 인간의 심리와 사회성 나아가 유전적 선호까지 바꿀 가능성입니다. 현재도 챗봇 친구, 가상 연인 같은 AI 기반 프로그램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앞으로 AI 로봇이 인간의 말동무나 돌봄이로 더 보편화된다면 일부 사람들은 인간 인간 관계보다 AI와의 관계를 더 편안하게 느낄지도 모릅니다. 이는 짝짓기와 번식 행동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입니다 . 예를 들어 AI가 사람들의 외로움을 완벽히 해소해주고 감정적 욕구를 충족시켜준다면, 굳이 결혼이나 출산을 하지 않는 이들이 늘어날 수 있습니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비혼과 저출산이 사회적 이슈인데, 여기에 AI “친구”나 “연인“의 등장은 이러한 흐름을 가속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가상 현실에서의 사회 활동이 늘어나고 현실 세계의 인간 접촉이 줄면, 장기적으로 사회성이나 대인 신뢰감 관련 유전자에 선택 압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 다시 말해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보다 혼자이거나 AI와 있는 것을 선호하는 성향이 생존과 번식에 불리하지 않게 된다면, 인류의 성격 분포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는 상상입니다. 또한 AI로 인해 경쟁과 매력의 기준도 변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주로 신체적 건강이나 생산 능력 등이 짝짓기에서 중요한 요소였지만, 미래에는 AI와 얼마나 잘 상호작용하는지, 예컨대 AI를 활용해 얼마나 높은 생산성을 내는지 혹은 AI와 공존하며 정신적 안정을 유지하는지 등이 새로운 적응적 가치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곧 주의 집중 시간, 성격 유형, 감정 조절 능력 등에 대한 자연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AI가 인간의 몸을 직접 개조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AI 기술이 발전하면 유전공학이나 사이버네틱스(인간-기계 결합) 분야에도 혁신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미 뇌-기계 인터페이스를 통해 뇌에 칩을 심어 기계와 직접 소통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고, AI의 도움으로 유전자 편집 기술을 정교하게 활용해 질병을 예방하거나 특정 신체 능력을 강화하려는 연구도 진행 중입니다. 가까운 미래에 AI가 인간 게놈 데이터를 완벽히 해석하여 어떤 유전자 조합이 어떤 능력과 연결되는지 알게 된다면, 인간은 스스로의 결정으로 다음 세대의 신체적 특징을 디자인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AI의 자문을 받아 더 강한 근육이나 뛰어난 지능을 부여하는 배아 선택을 한다면, 자연선택 대신 인공선택으로 진화 방향을 틀어버릴 수도 있겠지요. 또는 AI 로봇과 공생하는 사이보그 인류가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인공 장기나 로봇 팔 다리를 AI가 제어해주는 형태로 인간이 신체 능력을 보완받게 된다면, 전통적인 의미의 육체 한계는 크게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인간의 평균적 체질도 변화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AI 보조 의수를 달고 태어난다면, 이제는 굳이 인간 원래의 팔 힘이 강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그런 극단적인 변화까지는 아니더라도, AI는 분명 인류의 생활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문화 요소이기에 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도 변화 압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미래 예측들은 어디까지나 가설이자 상상 속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인류는 문화와 문명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바꾸어 온 존재였습니다. 물병 하나에서 시작된 작은 변화가 땀구멍을 진화시켰고, 불꽃 앞에서 익힌 고기가 턱뼈를 작아지게 했으며, 농경과 목축의 삶이 우리의 유전자마저 바꾸었습니다. 산업화와 디지털화의 파도 속에서 우리의 몸은 또 새로운 모습으로 대응하고 있지요. 그렇기에 AI와 함께할 미래에도 우리 인간의 형질은 문화의 빛에 비춰 끝없이 적응하고 변화할 것입니다. 그 긴 이야기를 인류는 앞으로도 써내려 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