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과잉의 시대

100년 전의 어느 천재를 지금 이 거리에 데려다 놓는다고 상상해 본다. 상대성이론을 홀로 세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라 해도 좋다. 그는 곧 자신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길을 걷는 평범한 직장인이 주머니에서 얇은 유리판을 꺼내 몇 초 만에 우주의 나이를 답하고, 단백질의 접힘을 그려 보이고, 낯선 언어로 된 계약서를 그 자리에서 옮겨 읽는다. 한 세기 전이라면 평생을 바쳐야 닿았을 지식의 끝자락에, 오늘의 사람들은 출근길 지하철에서 닿는다. 인류가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풍요다. 그리고 모든 풍요가 그렇듯, 이 풍요에도 이면이 있다.
인류는 거의 언제나 모자란 상태로 살아왔다. 호모 사피엔스가 이 행성에 등장한 약 30만 년의 시간 가운데, 인간이 풍요라 부를 만한 무엇을 누린 기간은 길게 잡아도 100년 남짓이다. 그 100년 중에서도 풍요가 그저 충분한 정도를 넘어 넘쳐흐르기 시작한 것은 최근 50여 년의 일이다. 30만 년에 견주면 찰나에 불과한 이 시간 동안, 인간은 결핍이라는 오래된 조건에서 벗어나 정반대의 조건과 마주하게 되었다. 모자람이 아니라 넘침, 부족이 아니라 과잉이 이 시대의 문제가 된 것이다.
과잉은 한 번에 오지 않았다. 그것은 세 번의 물결로 밀려왔다. 첫 번째는 물건의 과잉이었고, 두 번째는 음식의 과잉이었으며,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세 번째는 지식의 과잉이다. 세 번의 과잉은 저마다 인류를 위로 끌어올렸고, 동시에 저마다 새로운 병을 남겼다. 앞선 두 번의 과잉이 무엇을 가져왔고 인류가 그것을 어떻게 다스렸는지를 먼저 들여다본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세 번째 과잉의 정체와 그 처방도 조금은 또렷하게 보일 것이다.
30만 년의 결핍, 100년의 풍요
20세기 초, 헨리 포드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자동차를 올려놓으면서 인류의 생산 능력은 그 이전과 질적으로 달라졌다. 한 대를 만드는 데 며칠이 걸리던 자동차가 몇 시간 만에 조립되었고, 가격은 노동자가 살 수 있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풍요는 본래 위에서 아래로만 흘렀다. 왕족에게서 귀족에게로, 귀족에게서 자본가에게로 천천히 스며들 뿐, 그 물줄기가 노동자에게까지 닿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량생산은 그 물줄기의 방향을 바꾸었다. 자동차도, 라디오도, 가전제품도 노동자의 집 안으로 들어왔고, 풍요가 마침내 아래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대중문화라는 말이 의미를 가지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러나 생산의 능력이 소비의 능력을 넘어선 순간, 풍요는 곧장 위기로 바뀌었다. 공장은 멈출 줄 모르고 물건을 쏟아 냈지만 그것을 사 줄 사람의 지갑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창고에는 팔리지 않은 상품이 쌓였고, 1929년 가을 미국의 주식 시장이 무너지면서 그 모순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대공황의 풍경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기이한 장면 가운데 하나였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굶주리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값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농부가 길 위에 우유를 쏟아 버리고 옥수수와 밀을 태웠다. 모자라서가 아니라 넘쳐서 굶는 역설이었다. 대공황은 단순히 돈이 모자라서 생긴 위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만들 줄은 알지만 다 팔 곳이 없는, 명백한 과잉의 위기였다.
넘쳐 나는 생산을 받아 줄 시장을 찾는 일은 곧 국가의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자국 안에서 다 소화하지 못하는 물건은 바깥으로 내보내야 했고, 그 바깥의 시장과 자원을 차지하려는 경쟁은 열강 사이의 충돌로 번졌다. 식민지와 세력권을 둘러싼 다툼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이 과잉의 압력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인류가 이 첫 번째 과잉을 끝내 해소한 방식은 잔혹했다. 지구상의 판로가 더 이상 평화롭게 넓혀지지 않자, 세계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파괴를 택했다. 도시를 부수고 산업을 불태우고 나면, 다시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군수 공장은 쉴 새 없이 돌아갔고, 남아돌던 생산력은 마침내 쓸 곳을 찾았다. 과잉은 파괴를 통해 비워졌고, 재건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수요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인류가 결핍이 아니라 과잉 때문에 수천만 명을 잃은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야 인류는 비로소 과잉을 다스리는 더 나은 방법을 배웠다. 파괴로 수요를 만드는 대신, 풍요를 더 넓게 나누어 그 풍요가 스스로의 시장이 되게 하는 길이었다. 노동자의 임금이 오르고 사회 안전망이 깔리면서, 물건을 만드는 바로 그 사람들이 그 물건을 사는 소비자가 되었다. 생산과 소비가 한 몸이 되는 구조가 자리를 잡으면서 과잉의 압력은 안에서부터 풀리기 시작했다. 국가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국제연합이 세워지고, 무역과 통화를 조율하는 규범들이 만들어졌으며, 시장을 빼앗기 위해 총을 드는 대신 규칙 안에서 거래하는 질서가 들어섰다. 첫 번째 과잉은 인류에게 가장 비싼 수업료를 청구한 셈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과잉 그 자체가 재앙이었던 것이 아니라, 과잉 앞에서 인간이 내린 판단이 재앙을 불렀다는 사실이다. 같은 과잉을 두고 인류는 처음에는 파괴를 택했고, 나중에는 분배를 택했다. 무엇을 택하느냐가 전부였다.
두 번째 물결은 식탁 위에서 일어났다. 20세기 후반, 농업과 식품 산업의 생산성이 폭발하면서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칼로리가 모자라지 않은 시대를 맞았다. 굶주림과 싸워 온 30만 년의 몸은 칼로리가 보이면 일단 저장하도록 설계되어 있었지만, 이제 그 본능은 더 이상 생존의 무기가 아니라 질병의 원인이 되었다. 인간은 살기 위해 먹는 단계를 지나, 그저 먹는 즐거움을 위해 먹기 시작했다. 생존에 필요한 양을 훌쩍 넘긴 섭취가 일상이 되었고, 비만이라는 새로운 유행병이 전 세계로 번졌다. 음식의 과잉이 남긴 병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인류가 이 두 번째 과잉을 다스리는 방식이다. 식욕을 의지로 누르는 다이어트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러자 의학이 그 자리를 메웠다. 노보 노디스크의 위고비, 일라이 릴리의 마운자로처럼 식욕 자체를 약물로 가라앉히는 치료제가 등장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넘쳐 흐르는 칼로리 앞에서 스스로의 본능을 약으로 억제하기 시작했다. 넘침을 막기 위해 주사기를 드는 시대인 것이다. 첫 번째 과잉이 전쟁이라는 파괴로 해소되었다면, 두 번째 과잉은 규율과 약물이라는 훨씬 정교한 억제 장치로 다스려지고 있다. 인류는 분명히 더 현명해졌다.
여기까지가 인류가 이미 겪고 통과한 두 번의 과잉이다. 물건이 넘쳐 전쟁이 났고, 음식이 넘쳐 비만이 왔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세 번째 과잉, 즉 지식의 과잉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왔으며, 무엇으로 다스려야 하는가?
똑똑해진 인류
지식의 둑이 무너진 과정도 단계를 밟았다. 2000년대 들어 구글이 검색을 일상의 도구로 만들면서 정보의 불균형이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도서관에 가야 닿던 지식이 검색창 하나로 손안에 들어왔다. 뒤이어 2010년대의 모바일 혁명은 그 손안의 도구를 모든 사람의 주머니 속으로 옮겨 놓았다. 그러나 검색은 어디까지나 흩어진 정보를 찾아 주는 데 그쳤다. 그 정보를 읽고 꿰어 맞추고 해석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었다.
진짜 둑이 터진 것은 2022년 11월 30일이다. 이날 공개된 챗지피티는 정보를 찾아 주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정보를 이해하고, 분석하고, 사용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다시 풀어 주었다. 검색이 지식의 위치를 알려 주는 도구였다면, 이 새로운 도구는 지식 그 자체를 건네주는 창구였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최고의 석학 수십 명을 한자리에 모아도 모자랄 만한 지식과 판단의 통로가, 그 순간부터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열렸다.
그 결과 인류는 집단적으로 똑똑해졌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100년 전이라면 소수의 전문가만 다룰 수 있던 분석을, 오늘의 평범한 개인이 해낸다. 그 변화는 추상적인 통계가 아니라 일상의 장면 속에 있다. 작은 가게의 주인은 변호사를 찾아가지 않고도 임대 계약서의 독소 조항을 짚어 내고, 환자는 진단서를 받아 든 채 자기 병의 이름과 치료법을 미리 이해하고 의사에게 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지방의 학생은 도시의 비싼 과외 없이도 최고 수준의 설명을 들으며 공부하고, 개발자 한 사람은 예전이라면 팀 전체가 매달려야 했을 프로그램을 혼자 만들어 낸다. 어떤 종목에 투자해야 위험을 줄일 수 있는지, 정부가 내놓은 부동산 정책이 시장에서 어떻게 작동할지,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금리를 움직였을 때 그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를 개인이 스스로 따져 본다.
이 평준화의 폭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다. 과거에 지식은 곧 권력이었고, 권력은 그 지식을 소수에게 가두는 방식으로 유지되었다. 사제는 경전을 독점했고, 의사는 진단을 독점했고, 관료는 정보를 독점했다. 둑이 터지자 그 독점이 한꺼번에 풀렸다. 물질의 풍요와 외모의 평준화와 지성의 평준화가 동시에 도래한 이 세상을, 100년 전 사람이 본다면 유토피아라 부를지도 모른다. 결핍과 싸워 온 종이, 마침내 결핍 없는 세계를 지어 올린 것이다.
그러나 앞선 두 번의 과잉이 그러했듯, 이 세 번째 과잉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물건의 과잉이 전쟁을 불렀고 음식의 과잉이 비만을 불렀다면, 지식의 과잉은 도대체 무엇을 부르는가? 그 답은 똑똑해진 개인이 아니라, 그 개인을 마주 보아야 하는 권력의 자리에서 드러난다.
겁먹은 권력과 과잉의 판단 착오
통치하는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똑똑해진 세상은 결코 편안하지 않다. 과거에 정부와 개인 사이에는 도구의 격차가 분명히 존재했다. 정부는 방대한 자료와 전문가 집단과 분석 역량을 독점했고, 개인은 그 결정을 그저 받아들이는 쪽이었다. 지식의 과잉은 이 격차를 무너뜨렸다. 이제 개인도 정부가 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분석 도구를 손에 쥔다. 정책이 발표되는 즉시 수많은 개인이 그 의도와 허점을 동시에 들여다보고, 시장은 그보다 더 빠르게 반응한다. 똑똑해진 다수를 상대하는 일은, 통치하는 자에게 전에 없던 난제가 되었다.
문제는 권력이 이 난제 앞에서 겁을 먹을 때 시작된다. 똑똑해진 개인들이 두려운 나머지 방어적인 판단을 내리면, 그 대가는 사회 전체가 치른다. 금리를 내려야 할 국면에 거꾸로 올리고, 성장을 북돋아야 할 자리에서 성장을 옥죄는 식의 착오가 그렇게 일어난다. 그리고 이 착오가 정확히 인류를 이만큼 똑똑하게 만들어 준 인공지능 그 자체를 겨눌 때, 문제는 한 나라의 경제를 넘어선다.
역사는 과잉 앞의 판단 착오가 얼마나 값비싼지를 두 번이나 보여 주었다. 첫 번째는 앞서 본 대로다. 생산의 과잉을 끝내 평화롭게 풀지 못한 세계는 전쟁이라는 파괴로 그것을 비웠고, 그 대가는 더없이 가혹했다. 두 번째는 더 가깝다. 2000년대 초, 인터넷이라는 진짜 혁명이 막 시작되던 순간에 시장은 그것을 거품으로 단정했다. 닷컴 버블이 꺼지자 투자는 얼어붙었고, 살아남았다면 더 일찍 세상을 바꾸었을 기술들이 10년 가까이 뒤로 밀렸다. 혁명의 본질은 진짜였는데, 그 위에 낀 거품을 보고 혁명 전체를 부정해 버린 것이다. 거품을 걷어 내는 일과 혁명을 멈춰 세우는 일은 전혀 다른데도, 겁먹은 판단은 그 둘을 자주 혼동한다.
지금 인공지능은 정확히 그 갈림길에 서 있다. 한편에서는 거대한 자본이 데이터센터와 더 강한 모델을 향해 흘러들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것이 또 하나의 거품이 아니냐는 의심이 점점 커지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를 예견했던 투자자 마이클 버리는 2026년 5월 지금의 시장이 닷컴 버블의 마지막 국면을 닮았다고 경고했고,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제롬 파월과 제이피모건은 지금의 투자가 실제 매출에 연결되어 있어 그때와는 다르다고 본다. 그러나 거품이 끼었는지 아닌지는 사실 이 논쟁의 핵심이 아니다. 정말로 위험한 것은, 거품에 대한 공포가 혁명 그 자체를 거품으로 오인하게 만드는 일이다. 인공지능을 섣불리 거품으로 단정하여 투자를 거두어들이는 순간, 세계는 닷컴 시기의 실수를 그보다 훨씬 큰 규모로 되풀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 판단 착오는 한 산업의 손실로 끝나지 않고 인류 전체에 치명적일 수 있다. 이 논쟁의 온도가 곧장 시장의 떨림으로 옮겨 간다는 사실은 이미 우리 눈앞에 있다. 2026년 6월 23일, 한국의 코스피는 8퍼센트 넘게 폭락해 거래가 20분간 멈추는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되었다. 보름 전인 6월 8일에 이어 한 달 사이 두 번째였고, 그 방아쇠로 지목된 것은 다름 아닌 인공지능 과열에 대한 공포였다. 거품을 향한 두려움은 이미 추상이 아니라 우리 시장의 현실인 것이다.
이 공포가 정책의 영역으로 넘어오면 그 무게는 한층 무거워진다. 2026년 6월 12일, 미국 상무부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수출통제 지침을 내려 앤트로픽의 최신 모델 페이블 5와 미토스 5에 대한 외국 국적자 전원의 접근을 막았다. 이 지침은 미국 밖의 사람뿐 아니라 미국 안에 있는 외국 국적자, 심지어 앤트로픽 소속의 외국인 직원까지 포함했다. 국적을 실시간으로 가려낼 방법이 없던 회사는 결국 두 모델을 전 사용자 대상으로 중단시켰다. 공개된 지 사흘 만의 일이었다. 정부가 든 근거는 모델의 안전장치를 우회하는 한 가지 기법, 이른바 탈옥의 가능성이었다. 앤트로픽은 그것이 다른 공개 모델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좁은 수준의 취약점일 뿐이며, 이런 기준을 업계 전체에 적용한다면 어떤 회사도 새 모델을 내놓을 수 없게 된다고 반박했다.
이 사건의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것이 아니다. 안전을 지키려는 정부의 권한에도, 그 권한의 행사가 절차와 근거를 갖추어야 한다는 회사의 항변에도 저마다의 정당함이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 형식이다. 좁은 가능성 하나를 빌미로, 수억 명이 쓰던 도구가 하룻밤 사이에 통째로 사라졌다. 이것이야말로 과잉 앞에서 권력이 겁을 먹었을 때 벌어지는 일의 전형이다. 한 번의 강경한 조치는 그 모델을 쓰던 기업들의 수익성을 흔들고, 다음 투자의 의욕을 꺾고, 결국 기술의 성장 속도 자체를 늦춘다. 그리고 이런 조치가 거품에 대한 공포와 맞물려 투자 전반을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번진다면, 그 결과는 한 회사나 한 산업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지금의 모델은 도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에 가깝고, 이 기술이 약속한 변화의 대부분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그 변화를 끝까지 밀고 가려면 자본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들어와야 하고, 기술이 자랄 공간이 닫히지 않아야 한다. 과잉이 두려워 그 공간을 미리 닫아 버리는 일은, 1930년대의 세계가 전쟁으로 향하던 길과, 2000년대 초의 시장이 혁명을 거품으로 오판하던 길을 다시 걷는 것과 다르지 않다. 거품은 걷어 내되 혁명은 멈춰 세우지 않는 분별, 그것이 세 번째 과잉을 다스리는 첫 번째 조건이다.
야생성을 잃지 않은 자들
그렇다면 분별은 어디에서 오는가? 똑똑함의 평준화가 끝난 세상에서, 그 평준화를 넘어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에게는 똑똑함과는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 그 단서는 뜻밖에도 인간이라는 종의 가장 깊은 곳, 우리가 어떻게 지금의 우리가 되었는가 하는 물음 속에 있다.
듀크대학교의 인류학자 브라이언 헤어와 하버드대학교의 리처드 랭엄은 인간이 스스로를 길들였다는 가설을 오랜 연구로 다듬어 왔다. 자가가축화라 불리는 이 이론의 뿌리에는 한 편의 유명한 실험이 있다. 소련의 생물학자 드미트리 벨랴예프는 은여우 가운데 사람에게 덜 공격적인 개체만을 골라 거듭 번식시켰다. 단지 공격성이 낮은 쪽을 택했을 뿐인데, 세대를 거듭하자 여우들은 늘어진 귀와 둥근 얼굴 같은 어린 짐승의 특징을 지닌 채 자랐고, 성질은 한결 온순해졌다. 공격성에 대한 선택이 종 전체의 생김새와 기질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헤어와 랭엄은 인간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고 보았다. 호모 사피엔스는 무리 안에서 덜 공격적이고 더 협력하는 개체를 스스로 선호함으로써, 누가 길들인 것도 아닌데 스스로를 길들였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가축으로 삼은 종인 것이다.
이 자기 길들임이야말로 문명의 토대였다. 야생의 공격성을 안으로 눌러 협력을 택했기에 인간은 거대한 무리를 이루었고, 도시를 세웠고, 지식을 쌓아 마침내 지식의 과잉이라는 오늘에 이르렀다. 30만 년 가운데 압도적인 대부분의 시간을 야생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채 살아온 종이,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스스로를 길들임으로써 위대해진 것이다. 그러니 길들여짐은 인류의 약점이 아니라 성취다.
그러나 모두가 길들여진 세상에서, 프론티어에 서려는 자에게는 정반대의 자질이 요구된다. 둑이 터져 흘러넘치는 지식과 자본과 자극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은 길들여진 자의 태도다. 넘쳐 흐르는 칼로리 앞에서 본능대로 먹으면 비만에 이르듯, 넘쳐 흐르는 외부의 과잉에 자신을 내맡기면 정신도 같은 병을 앓는다. 프론티어의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그 흐름을 한 번씩 멈춰 세우는 야생의 힘이다. 외부의 과잉이 밀려올 때 그것에 끌려가는 대신, 목마름보다 절제를 택하고, 빌려 온 똑똑함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길어 올린 힘으로 다음 한 걸음을 떼는 태도다. 길들여짐이 문명을 지었다면,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성은 그 문명의 다음 경계를 연다.
이 말이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인류가 가야 할 곳을 떠올리면 그것은 더없이 구체적인 주문이 된다. 우리가 지금 머무는 곳은 지구다. 공기가 거저 주어지고, 물이 흐르고, 중력이 몸을 붙잡아 주고, 무엇이 잘못되어도 누군가 손을 내밀어 주는 곳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당연한 배경으로 여기지만, 사실 그것은 지구라는 단 하나의 행성이 베푸는 예외적인 보살핌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지구가 아니다. 달이고, 화성이며, 태양계이고, 그 너머의 우주다.
지구의 대기권을 벗어나는 순간, 인간은 다시 야생으로 돌아간다. 그곳에는 우리를 길들여 줄 문명도, 넘쳐 흐르는 풍요도 없다. 공기는 한 모금도 거저 주어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방사선이 끊임없이 몸을 두드리며, 한 번의 작은 실수가 곧장 죽음으로 이어진다. 화성까지 가는 데만 수개월이 걸리고, 그 길 위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구조선은 오지 않는다.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30만 년 전 우리 조상이 맨몸으로 마주했던 바로 그 야생이 지구 밖에서 인류를 기다리고 있다. 넘쳐 흐르는 지식과 자본에 길들여진 정신으로는 그 결핍을 한순간도 견딜 수 없다. 그곳에서 인간을 살리는 것은 빌려 온 똑똑함이 아니라, 위험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야생성이다.
그러므로 야생성을 버리는 순간, 인간은 영영 지구를 벗어날 수 없다. 스스로를 길들여 문명을 지은 종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길들여지기 이전의 힘을 되찾아야 하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 문명은 우리를 요람 안에서 안전하게 키워 냈지만, 요람을 떠나는 일만큼은 길들여진 자의 몫이 아니다.
세 번의 과잉을 관통하는 이야기는 결국 하나로 모인다. 물건의 과잉도, 음식의 과잉도, 지식의 과잉도, 과잉 그 자체가 인류를 해친 적은 없다. 인류를 위협한 것은 언제나 과잉 앞에서 인간이 보인 태도였다. 넘침에 끌려가 파괴를 택하거나, 넘침이 두려워 성장을 멈춰 세우는 그 판단이 재앙을 불렀다. 지식의 과잉이라는 세 번째 물결을 건너는 지금,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더 똑똑해지는 일이 아니다. 똑똑함은 이미 넘친다. 필요한 것은 그 넘침 앞에서 한 번씩 멈출 줄 아는 절제이며, 빌려 온 풍요가 아니라 내면에서 길어 올린 야생의 힘이다. 프론티어에 선 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여 그 야생성을 온전히 지킨 채 더 멀리 나아가기를, 그래서 인류가 지구라는 요람을 넘어 다음 경계에 닿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