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보다 실행이 중요한 시대

요즘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과거처럼 거창한 “미래 비전”만으로는 주목받기 어려워졌다. 투자 환경의 변화로 빠른 실행과 가시적 성과가 그 어느 때보다 중시되고 있다. 실제로 2021년까지 폭발적 성장을 좇던 벤처자금도 2023년 들어서는 “매출과 수익성 같은 펀더멘털에 대한 집중”으로 무게추가 이동했다. 다시 말해, 투자자들은 이제 원대한 청사진보다는 당장 입증된 실적과 실행력을 갖춘 팀에 자금을 맡기려는 경향이 강하다. 스타트업들은 이에 맞춰 제한된 자원으로 단기간에 성과를 보여주는 전략을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먼 미래를 내다보는 비전 자체의 가치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외부 환경이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지금 여기”의 성과로 생존을 확보한 뒤에야 비전을 펼칠 기회도 생기는 법이다. 창업 초기의 열정적인 비전 제시만으로 투자가 쏟아지던 시기는 지나갔다. 이제는 아이디어를 실제 프로덕트로 빠르게 구현해 시장의 반응을 검증하고, 필요하다면 즉시 방향을 수정하며 나아가는 민첩한 실행능력이 스타트업 성공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도구로서의 AI: 스타트업의 추진력 강화

AI는 이러한 실행력 중심 시대에 스타트업이 활용해야 할 가장 강력한 도구다. AI 기술 그 자체를 연구하여 경쟁우위를 만들기는 쉽지 않지만, 이미 공개된 AI 도구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면 작은 팀도 놀라운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소프트웨어 스타트업은 LLM을 이용해 고객문의 대응 챗봇을 금세 만들어낼 수 있고, 디자인 스타트업은 이미지 생성 AI로 시제품 비주얼을 단숨에 제작할 수 있다. 과거에는 전문 인력이 오래 걸렸을 작업들이 이제 AI를 통한 자동화로 업무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AI는 사람의 역량을 증폭시키는 “협업 파트너”로서 빛을 발한다. 개발자에게는 코딩 보조 AI가, 기획자에게는 문서 정리와 아이디어 생성 AI가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준다. 이를 통해 소수의 인원으로도 과거 빅테크 못지않은 생산성을 발휘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결국 AI를 도구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팀일수록 더 짧은 주기로 제품을 개선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어, 빠른 실행을 통해 앞서나갈 확률이 높아진다.

빅테크의 딜레마: AI 연구 개방 vs 느린 제품화

흥미롭게도 오늘날의 AI 붐을 이끈 핵심 기술 상당수는 빅테크 기업의 연구실에서 나왔다. 대표적으로 2017년에 발표된 ‘트랜스포머’ 논문은 현재 대부분 AI 언어모델의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기술 생태계를 빅테크가 만들어 공개해둔 덕분에, 스타트업들은 최첨단 AI 기술을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다. 문제는 정작 빅테크 자신들은 이 기술을 활용한 제품화 속도가 더디다는 점이다. 한 예로 빅테크 내부에서 탄생한 트랜스포머 기술도 관료적인 내부 절차와 느린 결정 속도로 인해 제때 제품에 적용되지 못했고, 결국 해당 연구자들이 회사를 떠나 스타트업을 창업하면서 생성형 AI 혁신의 물결을 일으켰다. 이처럼 빅테크의 굼뜬 실행력은 종종 기술 혁신의 주도권을 외부로 넘겨주는 아이러니를 낳고 있다.

왜 거대 기업들은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도 신속한 제품 혁신에 어려움을 겪을까?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방대한 조직 규모에서 오는 관성은 의사결정 단계가 많고 복잡해 속도보다 안정이 우선시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한 전직 빅테크 임원은 “회사는 수천 명이 반대할 수 있어도 승인할 사람은 없다”라며, 지나치게 많은 내부 견제로 인해 과감한 제품 출시는 어려운 구조를 꼬집었다. (기사)

KPI 구조의 단절과 부서 간 사일로는 빅테크 내 각 팀이 저마다의 성과지표에 몰두한 나머지 공동의 목표로 빠르게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을 만든다. 실제로 한 거대 IT 기업은 오랜 기간 별개 목표를 가진 두 개의 최고 AI 연구 조직이 따로 움직이는 비효율을 겪었다. 연구 성과를 제품 부서가 적극 활용하지 못하고 서로 단절된 채 운영된 것이다.

기존 비즈니스 모델과의 충돌은 혁신적 신기술의 도입을 기업 내부에서 고민하게 만드는 주된 원인이다. 특히 신기술이 회사의 주력 사업을 직접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면, 빅테크는 도입을 망설이게 된다. 실제로 한 글로벌 IT 기업은 뛰어난 대화형 AI 챗봇 기술을 이미 확보했음에도 이를 곧바로 제품에 적용하지 않았다. 사용자들이 AI 챗봇을 통해 원하는 답을 즉시 얻을 경우, 기존의 검색 광고와 같이 연간 1,500억 달러 규모에 달하는 핵심 수익 모델이 흔들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회사는 급진적인 혁신보다는 기존의 수익 창출 모델을 보호하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과도한 위험 회피 경향 또한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브랜드 이미지와 법적 리스크에 민감해지는 이유다. AI 챗봇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거나 윤리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 때문에 출시를 망설이는 사이에, 작은 플레이어들이 먼저 시장을 선점하곤 한다. 일정 수준 안전성이 담보될 때까지 기다리다 보니 출시 타이밍을 놓치는 사례도 많다.

이러한 이유들로 빅테크의 내부 혁신 속도는 연구개발 성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딘 경우가 많다. 실제로 한 글로벌 기업은 일찍이 “AI 우선” 기조를 천명하고도 정작 오랜 기간 뚜렷한 제품을 내놓지 못해, 트랜스포머 논문의 저자들마저 회사를 떠나고 주가가 급락하는 상황을 맞았다. 한편으로 한 스타트업이 AI 챗봇을 공개하자 불과 며칠 만에 수백만 사용자가 몰려들고, 심지어 “기존 검색을 대체할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온 반면, 같은 시기 해당 글로벌 기업이 개발한 챗봇 모델은 사내 시범 수준에 머물렀던 것은 극명한 대비를 이뤘다. 이렇듯 빅테크의 느린 움직임은 오히려 작은 경쟁자들이 치고 올라올 빈틈을 제공하고 있다.

작은 조직의 강점: 오픈소스 AI의 빠른 흡수

반대로 스타트업은 작고 민첩한 조직 구조 덕분에 이러한 빈틈을 공략할 수 있다. 빅테크가 공개해놓은 AI 기술과 오픈소스 생태계를 전략적으로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속도에서 스타트업은 확실한 우위를 가진다. 오픈소스 AI 모델과 라이브러리는 전 세계 개발자들에게 열려 있어 기술 장벽을 낮추고 진입장벽을 평평하게 만든다. 다시말하자면 오픈소스 AI는 스타트업이 빅테크와 경쟁할 수 있도록 판을 평평하게 만들어준다. 즉, 누구나 첨단 도구에 접근할 수 있기에 아이디어와 실행력이 뛰어난 팀이라면 규모와 무관하게 승부를 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픈소스 AI의 확산은 기술 혁신의 범위를 넓힐 뿐 아니라 속도도 높이고 있다. 예를 들어 Meta는 자체 개발한 대형 언어모델 LLaMA를 공개해 연구자와 개발자들이 이를 자유롭게 튜닝하여 각종 응용 제품에 활용할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전 세계 커뮤니티가 해당 모델을 기반으로 번역, 요약, 코딩 도우미 등 다양한 실험과 개선을 쏟아내며 NLP 분야 혁신의 물결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빅테크이 공개한 기술을 스타트업이 흡수해 빠르게 제품화하는 선순환은 AI 시대에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거대 기업들이 깔아놓은 기술 인프라와 연구 성과 위에서 가볍게 달리기만 하면 되는 유리한 상황인 셈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그 기술을 잡아채 실제 사용자에게 가치 있는 서비스로 구현해내느냐의 싸움이다.

OpenAI와 Cursor: 빠른 실행으로 앞서나간 사례

OpenAI와 Cursor는 이러한 전략의 성공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OpenAI는 2015년 비영리 연구소로 시작한 작은 조직이었으나, 2022년 말 세계 최초의 대중적 초거대 언어모델 챗봇인 ChatGPT를 전격 공개하며 일약 업계 선두로 부상했다. 출시 직후 일반인 100만 명 이상이 며칠 만에 몰려들 만큼 폭발적 반응을 얻자, 그제야 구글 등 거대 기업들이 뒤늦게 대응에 나선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구글 내부에서도 “스타트업 속도로 움직이라”는 위기감이 돌 정도로 OpenAI의 민첩한 실행력은 AI 주도권 경쟁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명의 신생 연구소였던 OpenAI가 과감한 제품 출시로 빅테크를 앞지른 장면은, 작은 조직이더라도 신속한 실행으로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Cursor의 사례도 인상적이다. 불과 10여 명 남짓한 인원으로 시작된 이 스타트업은, 마이크로소프트의 VS Code 편집기를 Fork하여 친숙한 개발 환경에 GPT-4 등의 최첨단 AI 기능을 결합하는 기발한 전략을 취했다. 그 결과 출시 1년 만에 전 세계 36만 개발자가 사용하는 필수 앱이 되었고, Fortune 1000 대기업 절반 이상이 도입을 결정했을 정도로 빠르게 퍼졌다. 심지어 GitHub의 Copilot보다도 높은 검색량을 보이며 개발자들 사이에 폭발적 인지도를 얻었고, 연 1백만 달러에 불과하던 ARR을 불과 1년 새 1억 달러 규모로 끌어올리는 성장을 이뤘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Cursor는 시리즈 B 투자에서 기업가치 25억 달러를 인정받기도 했다.(현재기업가치 140억 달러) 작은 팀의 민첩함과 개방형 기술 활용 능력이 어떻게 거대 기업의 움직임을 앞지를 수 있는지 Cursor는 극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두 사례 모두 “비전”보다는 눈앞의 실행과 결과물에 집중한 전략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OpenAI는 완벽하지 않은 초기 모델이라도 대중에게 공개하며 사용자 피드백을 빠르게 흡수했고, Cursor는 완전히 새로운 에디터를 처음부터 개발하기보다 기존 오픈소스 플랫폼을 활용해 속도를 높이는 실행 지름길을 택했다. 이렇듯 스타트업은 남들이 만들어둔 생태계를 기민하게 활용하고, 큰 그림보다는 MVP 수준이라도 빨리 내놓고 개선해나가는 방식으로 시장 선점 효과를 누릴 수 있다.

AI 협업 코딩과 바이브 코딩: 개인 개발자의 생산성 혁신

최근 부상하는 “AI 협업 코딩” 또는 “바이브 코딩” 트렌드는 소규모 팀, 더 나아가 개인 개발자의 개발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사례다. 바이브 코딩이란 AI와의 대화만으로 원하는 기능을 구현해보는 새로운 프로그래밍 접근을 의미한다. 마치 개발자 곁에 유능한 가상 페어 프로그래머가 앉아 있는 것처럼, 사람이 아이디어나 요구사항을 자연어로 설명하면 AI가 알아서 코드를 생성하고 개선해주는 형태다. 이를 통해 전통적으로 몇 주 걸릴 프로토타입을 단 몇 시간 또는 몇 분 만에 완성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예를 들어 한 개발자가 AI 코딩 도구인 CursorAI 기반 IDE에 간단한 앱 아이디어를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입력하여, 불과 30분 만에 지역 이벤트 정보와 날씨 데이터를 연동하고 캘린더 예약까지 가능한 완전한 웹 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코드 한 줄 직접 쓰지 않고도 AI와의 대화만으로 실용적인 애플리케이션이 탄생될 수 있다. 이는 개발 경험이 적은 개인도 아이디어만 있다면 곧바로 구현해볼 수 있는 엄청난 실행력의 향상을 뜻한다. Github의 Copilot, Replit의 Ghostwriter, 그리고 Cursor와 같은 도구들의 등장으로 혼자서도 소프트웨어를 빠르게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면서, 일각에서는 “개인 인디 개발자의 황금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물론 이러한 AI 보조 코딩이 만능은 아니라서, 생성된 코드의 품질 검증과 유지보수는 여전히 개발자의 몫으로 남는다. 하지만 초기 제품을 구현하고 시장 반응을 얻는 속도만큼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진 것이 중요하다.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시제품 개발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혁신적으로 절감할 수 있고,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실험을 병렬적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곧 스타트업의 실행력 향상과 직결되는 경쟁력으로, 앞서 언급한 실행 중심 시대에 결정적인 무기가 되고 있다.

투자 시장의 변화: 성과에 무게를 두다

이렇게 AI를 활용한 빠른 실행이 가능해진 시대적 배경에는 투자 시장의 변화도 한몫한다. 벤처캐피털 등 투자자들은 최근 스타트업 평가에 있어 “지금 창출된 성과”에 훨씬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한때 미래 잠재력에 베팅하는 분위기가 강했다면, 이제는 확인된 지표와 검증된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팀에만 투자가 집중되는 경향이 뚜렷하다. 2023년 한 해 스타트업 투자 건수가 크게 줄어든 가운데, 고금리·경기불안 등의 영향으로 투자의 기준이 보수화되었기 때문이다. 투자 유치에 성공한 스타트업들을 보면 흑자 전환을 이루었거나, 뚜렷한 사용자 성장 지표를 제시하는 등 “당장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대한 증명을 끝낸 팀들이 많았다.

이렇듯 시장의 자금이 선택적으로 흐르게 되면서, 스타트업들은 단기간에 명확한 성과를 입증해 보이는 것이 생존의 전제가 되고 있다. 수익 모델이 불분명한 채 “사용자만 모으면 된다”는 식의 전략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대신 작더라도 수익을 내거나 탄탄한 유저 충성도를 증명하는 사례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해졌다. 비전은 장기 전략 차원에서 갖추되, 단기적으로는 작은 성공들을 쌓아 나가며 신뢰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앞서 논의한 빠른 실행과 AI 활용의 필요성으로 다시 연결된다. 제한된 시간과 자원 속에서 성과를 내려면 AI의 힘을 빌려 개발 속도를 높이고, 팀원 각자가 멀티플레이어가 되어 기민하게 협력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론: AI와 팀워크로 단기 성과를 증명하라

정리하면, 스타트업의 현실적 성장 전략은 “실행력 극대화”로 귀결된다. 특히 AI를 적극 활용하여 작은 팀의 생산성을 기하급수적으로 높이고, 빅테크가 마련해둔 기술 생태계를 빠르게 자기 것으로 흡수함으로써 단기간에 유의미한 성과를 창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기에는 거창한 청사진보다는 좁고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집중적인 팀워크로 달성해내며 계단식으로 성장하는 전략이 바람직하다.

현재의 투자자와 시장은 “말보다는 실천”, “미래보다는 현재”에 호응한다. 스타트업이라면 주어진 도구(AI)와 환경(오픈소스 생태계)을 십분 활용하여 실행 속도를 높이고, 짧은 주기의 성과 검증 사이클을 구축해야 한다. 이런 실행 중심 문화를 갖춘 팀만이 불확실성이 큰 시장 속에서도 신뢰를 얻고 꾸준한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비전은 실행을 통해서만 현실이 된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자가 살아남는 시대다. 작게 시작하더라도 AI라는 추진력과 민첩한 실행력을 등에 업고 달린다면, 스타트업도 충분히 거인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판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Transformers: the Google scientists who pioneered an AI revolution (Aikatana, 2023)

Inside Google’s Two-Year Frenzy to Catch Up With OpenAI (Wired, 2025)

What Google’s ChatGPT scare tells us about the company on its 25th birthday (FastCompany, 2023)

We cannot allow AI to make Big Tech even bigger (Steve Case, CNBC Op-ed, 2023)

Cracking the code of vibe coding (Medium UX Collective, 2025)

What was it like to raise VC funding in 2023? (Carta, 2023)

12명의 Cursor AI는 어떻게 MS와 맞서나 (브런치스토리, 2025)

AI가 열어가는 ‘인디 개발자’ 황금시대 (브런치스토리,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