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뇌 : 협력하는 뇌의 진화와 기억의 외부화
개미와 벌, 그리고 인간의 협력과 사회적 뇌
개미와 벌 같은 사회성 곤충은 수많은 개체가 협력하여 하나의 집단을 이룹니다. 일개미들은 평생을 여왕과 형제자매를 돌보며 ‘초유기체”라고 불릴 만큼 조화롭게 움직입니다. 이런 곤충 집단에서는 각 개체의 뇌는 매우 작지만, 군체 전체로 보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복잡한 문제를 해결합니다. 예를 들어 개미 집단은 먹이를 탐색하고 둥지를 유지하며, 벌 무리는 정교한 꿀 생산 체계를 구축합니다. 한 개미나 한 마리 벌은 미약하지만, 수만 마리의 집단은 일사불란하게 행동하여 놀라운 집단 지능을 발휘합니다. 이것을 일종의 “사회적 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인간 역시 뛰어난 협력 능력을 갖춘 사회적 동물입니다. 개미나 벌처럼 대가족과 분업 체계를 이루며 살아갈 뿐 아니라, 혈연이 아닌 타인과도 폭넓게 협력합니다. 인간 사회는 때로 진사회성의 일부 조건을 충족한다고까지 여겨집니다. 그러나 인간의 협력 방식은 곤충과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개미나 벌은 본능과 화학 신호로 조직화된 반면, 인간은 개개인이 가진 높은 인지 능력과 문화를 바탕으로 협력합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목표를 향해 의식적으로 협동하는 능력, 즉 집단적 지향성을 발휘하는 것이 인간 사회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능력 덕분에 인류는 ”초사회성” 종으로 불릴 만큼 유연하고 규모 큰 협력을 이뤄냈습니다. 요컨대 인간은 각 개인의 뇌는 한계가 있어도, 사회 전체가 하나의 뇌처럼 작동하도록 진화해 온 것입니다.
인간 사회적 뇌의 진화
인류 역사에서 뇌의 진화는 사회적 협력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뇌과학자들의 사회적 뇌 가설에 따르면, 우리의 조상은 복잡한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큰 뇌를 발달시켰다고 합니다. 실제로 무리 지어 사는 영장류일수록 뇌 용량이 크며, 인간은 그 정점으로서 거대한 뇌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는 친밀한 사회 관계망을 유지하고 타인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많은 지적 자원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감정과 욕구를 이해하고, 협동하고, 때로는 속임수도 간파하려면 ”머리를 많이 써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개별적인 뇌 용량만 키운 것이 아니라, 뇌들 간의 연결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약 5만 년 전 인지 혁명을 거치며 나타난 언어와 예술은 지식을 공유하는 능력을 비약적으로 높였습니다. 서로 협력하여 사냥을 계획하고, 도구 만드는 법을 전수하며, 신화와 규범을 함께 믿는 집단이 등장했습니다. 협력과 정보 공유의 폭발을 통해 우리 종은 경쟁자였던 네안데르탈인 등 다른 인류를 제치고 지구 전역으로 퍼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생겨난 언어와 상징은 인간을 서로 묶어주는 신경망과도 같았습니다. 사회적 뇌, 즉 여러 두뇌가 연결된 거대한 인지망이 인류 생존의 열쇠가 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현대 인류의 두뇌는 신체 진화 측면에서 오히려 조금 작아진 것으로 보입니다. 수만 년 전 후기 구석기 시대에 인간의 평균 두개골 용적이 정점에 달한 후, 최근 수천 년 동안 약간 감소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인간이 스스로를 가축화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지나치게 공격적이거나 비협조적인 개인을 배제하면서 더 온순하고 협력적인 성향을 가진 집단으로 변해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가축화된 동물들이 야생 종보다 두뇌가 다소 작아지는 경향이 있는데, 인간도 사회를 이루며 공동체에 맞게 자기 자신을 다듬는 과정에서 비슷한 변화를 겪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유력한 해석은, 인간이 지식을 외부에 저장하고 집단의 판단에 의존하게 되면서 굳이 큰 뇌를 유지할 필요가 줄어들었다는 관점입니다. 즉 혼자 모든 것을 기억하고 결정하기보다, 여럿이 머리를 맞대는 환경에서는 개인당 인지 부담이 줄어들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인간의 뇌는 개인 안에서보다 사회 속에서 더 크게 작동하도록 진화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억의 외부화: 벽화에서 정보혁명까지
인류는 오랜 세월에 걸쳐 기억을 뇌 바깥으로 꺼내어 저장하는 기술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선사 시대의 동굴 벽화를 떠올려봅시다. 수만 년 전 우리 조상은 사냥 장면이나 의례 장면을 암벽에 그려 넣어 경험을 기록했습니다. 알타미라나 라스코의 벽화들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부족의 지식과 이야기를 후대에 전하는 최초의 외장 기억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로 전해 들은 것보다 그림으로 남긴 기억은 훨씬 오래 또 멀리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문자의 발명은 기억 외부화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기원전 3000년 무렵 인류는 문자를 만들어내어 말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호로 정착시켰습니다. 이를 통해 구전으로는 불가능한 방대한 정보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점토판과 파피루스에 새긴 기록은 법률, 거래, 역사, 신화를 체계화하여 문명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문자 기록은 개인의 두뇌를 넘어 집단 지성의 보고가 되었습니다. 한 세대가 배운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정확히 전할 수 있고, 먼 지역 사람도 간접적으로 지식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집단적 기억 능력이 비약적으로 커진 것입니다.
인쇄술의 발달과 책의 보급으로 지식의 외부화는 가속도를 붙였습니다.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중세의 한계에서 벗어난 폭발적인 정보 확산이 일어났습니다. 지리적으로 떨어진 지식들이 책과 서신을 통해 연결되었고, 과학 혁명과 계몽 사상이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8~19세기의 산업혁명 시기에 이르러 인류는 지식의 축적과 응용에서 새로운 시대를 맞았습니다. 증기 기관과 기계화로 물질 세계를 재편하는 동안, 교육과 신문, 통신 수단도 발전하여 정보가 더욱 빠르게 순환했습니다. 산업혁명은 단순히 기계를 발명한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이 정보를 생산·유통·활용하는 방식을 크게 바꿔 놓은 사회 혁명이기도 했습니다. 대중 교육을 통해 읽고 쓰는 인구가 폭증하자 집단 지성의 규모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습니다.
20세기 후반, 정보화 혁명이 시작되면서 기억의 외부화는 정점에 이릅니다. 컴퓨터의 등장으로 인간은 거대한 데이터 처리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지식은 더 이상 책장이나 서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코드로 변환되어 전 세계 어디에서든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엔 한 사람이 평생 읽기 어려울 양의 정보를 이제는 하드디스크 한 대에 담을 수 있고, 클릭 한 번으로 수백만 권의 도서 자료를 검색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의 보급은 인류를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지구촌 어느 곳에서 일어난 일도 순식간에 모두의 지식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현대인은 스마트폰 하나로 전 인류가 쌓아온 지식에 실시간으로 접속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동굴 벽화의 시작부터 문자, 인쇄,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화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기억을 외부 세계에 축적함으로써 개개인의 뇌 능력을 집단의 힘으로 확장해온 것입니다.
도구를 넘어 행동의 주체가 된 AI 혁명
오늘날 우리는 또 하나의 거대한 전환점인 AI 혁명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AI도 이전의 도구처럼 인간이 만든 지적인 도구에 불과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AI 혁명의 본질은, 인공지능이 기존의 보조적 도구를 넘어 인간 행동의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전까지의 기술들은 비록 우리의 육체적·정신적 능력을 증강시켰지만, 어떤 일을 할지 결정하는 주도권은 언제나 인간에게 있었습니다. 예컨대 컴퓨터는 방대한 계산과 자료 검색을 대신해주었지만, 무엇을 계산할지, 어떤 정보를 찾을지는 사람이 지시했습니다.
이제는 양상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자율 주행 자동차는 인간의 개입 없이 도로 상황을 판단해 스스로 운전하고, 의료 인공지능은 의사의 최종 판단을 돕는 수준을 넘어 직접 질병을 예측하고 진단하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추천 알고리즘과 챗봇 AI가 우리의 소비 습관과 여론 형성에 영향을 주며, 때로는 인간보다 더 능동적으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합니다. 다시 말해, 도구였던 AI가 이제 행위자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현재의 인공지능이 자의식을 갖고 스스로 목적을 세우는 건 아니지만, 주어진 목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직접 통제 없이도 학습하고 판단을 내리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기술이 인간의 뇌 일부를 실질적으로 대행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기억의 영역에서 이미 컴퓨터와 인터넷이 인간을 대신해 방대한 정보를 저장·제공해주고 있듯, 이제는 판단과 예측의 영역에서 AI가 인간을 대신해가는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복잡한 계산을 암기하지 않아도 공학 문제를 풀 수 있고, 길을 몰라도 내비게이션이 안내해주며, 심지어 누구와 데이트를 할지도 알고리즘 추천에 의존하기도 합니다. AI는 우리의 외장 두뇌로서 단순 조언자가 아닌 능동적 파트너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AI 혁명은 단순한 도구의 진화 단계를 넘어, 인간 사회에 새로운 의사결정 주체가 등장한 혁명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인간 스스로를 길들여온 역사와 AI의 연결
인공지능이 우리의 삶 속으로 주체적으로 들어오게 된 현상은 낯설고 혁신적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이 스스로를 길들여온 오랜 역사의 연장선에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인류는 기술을 발명하고 사회를 조직하면서 자신의 행동 양식을 바꾸고 진화시켜 온 존재입니다. 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식생활과 수면 패턴을 바꾸었고, 농경 사회를 이루면서 정착생활에 맞추어 새로운 규율과 협동심을 길렀습니다. 법과 도덕, 교육과 문화는 세대를 거쳐 인간의 본능을 다스리고 사회에 적합한 성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인간이 “자기가축화” 를 이루었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우리가 만든 환경에 맞게 우리 자신을 적응시켜 온 것입니다.
이 자기 길들이기의 과정에서 기술은 중요한 매개체였습니다. 시계와 공장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에 맞춰 생활하는 법을 배워야 했고, 자동차와 비행기가 나오자 더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새로운 규칙들이 생겼습니다. 한때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은 소수 전문가의 몫이었지만, 지식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문해력을 갖추도록 교육함으로써 사회를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기술 혁신마다 인간은 스스로의 습관과 사회 제도를 바꾸며 적응해온 것입니다.
AI 혁명도 이 흐름과 닮아 있습니다. 비록 AI가 매우 특이하고 강력한 기술이지만, 결국 인간은 이 새로운 지능과 공존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자신을 길들이는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AI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교육을 고민하며 자라나는 세대에게 연결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를 길러 주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AI와 협업하는 법을 배우고, AI의 한계를 인식하며 책임 있게 활용하는 규범을 마련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인간 사회가 AI라는 새로운 구성원과 함께 지속하기 위해 스스로를 조율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인간이 오랫동안 해온 “자기 진화”의 연속선상에서 AI를 도구 삼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인 것입니다. 결국 AI는 인간 역량의 확장판이자, 그 역량을 어떻게 쓸지에 대한 인간의 선택이 담긴 거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자신을 길들이며 문명을 발전시켜 왔듯이, AI와의 공존도 우리에게 새로운 자기 단련과 성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음 장을 향하여
개미와 벌에서 찾은 협력의 비밀과 인간의 사회적 뇌 진화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로서 인공지능 혁명 역시 인류사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개별 뇌의 한계를 넘어 집단 지성을 키워 온 우리는 마침내 인간 밖에 존재하는 인공지능과도 협력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AI는 새로운 도전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진화의 도구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다면, 우리는 AI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길들여 나갈 파트너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다음 장에서는 AI가 구체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발전할지를 더욱 깊이 있게 다뤄보겠습니다. 역사 속에서 살펴본 인간과 도구의 관계를 바탕으로, 다가올 미래의 인간-AI 공진화 가능성을 전망해 보겠습니다.
참고자료
Jeremy M. DeSilva 외, 「When and Why Did Human Brains Decrease in Size? A New Change-Point Analysis and Insights From Brain Evolution in Ants」, Frontiers in Ecology and Evolution
Brian Hare & Vanessa Woods, Survival of the Friendliest: Understanding Our Origins and Rediscovering Our Common Humanity, Random House
Gene Tracy, 「How much can we afford to forget, if we train machines to remember?」, A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