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오후, 동네 공원 정자 밑에 장기판이 펼쳐져 있다. 나무판은 오래 써서 모서리가 닳았고, 붉은 글씨와 푸른 글씨의 말들은 손때가 묻어 반들거린다. 두 노인이 마주 앉아 있다. 한 사람은 턱을 괸 채 한참째 판을 내려다보고, 다른 사람은 종이컵에 따른 믹스커피를 홀짝이며 상대의 손끝을 기다린다.

그 뒤로 구경꾼 대여섯이 뒷짐을 지고 둘러서 있다. 산책 나왔다가 발길을 멈춘 사람, 막걸리 한 병을 손에 든 사람, 다음 판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판을 두는 사람은 둘인데 판을 읽는 사람은 여럿이다.

마침내 한 수가 놓인다. 포가 졸을 넘어 상대 진영 깊숙이 들어간다. 뒤에서 누군가 혀를 찬다. “그게 아니지. 차를 먼저 빼야지.” 다른 누군가가 거든다. “저러면 세 수 안에 장군 받는다.” 두는 사람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세 수 뒤, 정말로 “장군” 소리가 정자 밑에 울린다.

이상한 일이다. 판을 두는 사람이 그 판을 가장 오래, 가장 가까이에서 들여다봤다. 수를 고민한 시간도 훨씬 길다. 그런데 정작 판을 더 정확히 읽은 쪽은 지나가다 멈춰 선 구경꾼이다. 실력 차이가 아니다. 그 구경꾼도 막상 판 앞에 앉으면 똑같이 헤맨다. 다른 것은 서 있는 위치뿐이다.

판 위의 말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졸은 눈앞의 한 걸음만 안다. 마는 자기가 뛸 수 있는 곳만 알고, 차는 막힘없이 달릴 수 있는 길만 안다. 말은 자기가 왜 그 길로 가는지, 판 전체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른다. 말을 쥔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눈앞의 수에 몰두할수록 시야는 좁아지고, 좁아진 시야로는 상대의 수도 판의 흐름도 보이지 않는다.

구경꾼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뒤쪽에서 멀찌감치 판을 보던 사람이 있다. 그의 눈에는 판 위의 수만 들어오지 않는다. 정자 주변의 풍경까지 함께 보인다.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몰려선 이 장기판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돌 탁자 하나가 있다. 늦가을의 쌀쌀한 바람 속에서도 그곳에만 햇볕이 고여 있고, 탁자 위에는 깨끗한 체스판이 놓여 있다. 말들은 가지런히 서 있고, 앉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장기판 앞에 붙어 선 사람들은 그 체스판을 보지 못한다. 고개를 돌릴 틈이 없다. 멀찌감치 선 사람에게는 답이 간단하다. 붐비는 판 앞에서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을 이유가 없다. 햇볕 드는 저 탁자로 가서 체스를 두면 된다. 장기와 체스는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놀이다. 말의 모양과 규칙은 조금 다르지만 수를 읽고 판을 짜는 이치는 같다.

지금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붐비는 장기판 위의 말이다. 판의 이름은 에이전트 전쟁이다. 새 모델이 나올 때마다 판은 조금씩 좁아지고, 말들은 남은 길을 두고 서로 밀어낸다. 누가 더 빨리 새 도구를 익히는지, 누가 에이전트를 더 잘 부리는지를 두고 매일 수를 겨룬다. 판 위에서는 자기 앞의 길만 보인다. 몇 걸음 옆, 햇볕 아래 비어 있는 체스판은 보이지 않는다. 그 체스판의 이름은 바이오코딩이다.

판 밖에서 둘 수 있는 훈수는 하나뿐이다. 붐비는 장기판에서 손을 떼고, 햇볕 드는 체스판으로 건너가라.

코드를 짜는 능력이 더 이상 귀하지 않다

AI는 전문가라는 호칭의 무게를 덜어 냈다. 송사가 생기면 변호사 사무실보다 챗GPT를 먼저 연다. 세무 처리와 절세 방법도 회계사 대신 AI에게 묻는다. 웹과 앱을 만들려고 개발 외주사를 찾던 회사들은 이제 사내 기획자가 에이전트에게 화면과 서버를 직접 만들게 한다.

위협받는 쪽은 매일 음식을 나르는 배달원이나 건설 현장의 노동자보다 책상에 앉아 일하는 지식노동자다. 몸을 쓰는 일은 로봇이 아직 따라오지 못했지만, 머리를 쓰는 일은 언어 모델이 먼저 따라잡았다. 자동화의 순서가 예상과 반대로 왔다.

이런 이야기조차 이제 식상하다. 많은 사람이 이미 몸으로 겪었다. 지난 1년 6개월 사이의 변화는 그만큼 빠르고 날카로웠다. 작년 이맘때 사람이 며칠 걸려 하던 일을 지금은 에이전트가 몇 시간 만에 끝낸다.

속도가 바뀌자 경쟁의 규칙도 바뀌었다. 예전에는 새 기술을 남보다 몇 달 먼저 익히는 것이 경쟁력이었다. 지금은 새 모델이 나오면 다음 날부터 모두가 같은 능력을 쓴다. 먼저 배워서 얻는 우위가 며칠짜리가 됐다.

외주 개발 시장이 가장 먼저 흔들린 이유도 같다. 외주는 고객이 직접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해 주고 돈을 받는다. 고객이 에이전트로 직접 할 수 있게 되면 대신해 줄 일이 사라진다. 남는 것은 고객이 시간이 없어서 맡기는 일뿐이고, 그런 일에는 낮은 값이 매겨진다.

변화는 숫자로도 드러난다. 구글은 2026년 4월 회사에서 새로 작성되는 코드의 75%를 AI가 만들고 엔지니어가 승인한다고 밝혔다. 2024년 10월에는 25% 남짓이었다. 1년 반 만에 코드를 쓰는 주체가 사람에서 AI로 넘어갔다.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소프트웨어를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어난 일이다.

일자리도 그대로 따라 움직였다. 스탠퍼드 디지털경제연구소의 에릭 브린욜프슨 교수 연구팀은 미국 최대 급여 처리업체 ADP의 급여 자료를 분석했다. 22세에서 25세 사이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고용은 2022년 말 이후 약 20% 줄었다. 올봄에는 AI가 두 달 연속 미국 기술 기업 감원의 가장 큰 단일 사유로 꼽혔다. 코드를 AI가 쓰니 코드를 쓸 사람을 덜 뽑는다. 원인과 결과가 그대로 이어진다.

단언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은 끝났다. 소프트웨어가 필요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다. 소프트웨어는 앞으로 지금보다 훨씬 많이 만들어질 것이다. 끝났다는 것은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기술의 희소성이 0으로 수렴했다는 뜻이다.

희소성이 사라지면 값도 사라진다. 누구나 에이전트에게 말로 시켜 동작하는 코드를 얻는다면, 코드를 짜 주는 사람에게 높은 값을 치를 이유가 없다. 시장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드문 것에 돈을 낸다. 물과 공기는 생존에 꼭 필요하지만 아무도 비싼 값을 치르지 않는다.

지금 업계는 에이전트 전쟁 중이다. 모델은 몇 달마다 좋아지고 코딩 도구 회사들은 서로의 기능을 따라잡느라 바쁘다. 개발자들은 새 도구를 누구보다 빨리 익히는 것으로 살아남으려 한다. 그런데 도구가 좋아질수록 필요한 개발자 수는 줄어든다. 좁아지는 시장 안에서 피 터지게 싸워서 얻는 것은 줄어드는 몫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른 전문가들도 각자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발자에게 보이는 먹거리는 단 하나다. 바이오코딩이다. 코드를 짜던 손으로 생명을 읽고 설계하고 고치는 일이다.

바이오 쪽에 기회가 생길 것이라 보고 10년 동안 틈틈이 바이오를 공부해 왔다. 지난 4월 「대체될 사람들에게」라는 글에서도 용기를 내 바이오코딩으로 건너가라고 썼다. 반년이 지난 지금 그 판단은 더 단단해졌다.

생명과 컴퓨터는 같은 방식으로 일한다

바이오를 공부할수록 놀라게 되는 점이 있다. 생명과 컴퓨터가 너무 닮았다는 것이다. 하나는 고깃덩어리이고 다른 하나는 실리콘 덩어리다. 재료는 전혀 다르지만 일하는 방식은 같다. 둘 다 정보를 저장하고, 그 정보를 번역하고, 실행한다.

먼저 저장이다. 컴퓨터는 0과 1, 두 개의 숫자로 모든 정보를 저장한다. 2진법이다. 사람이 읽기 편하도록 16진법으로 바꿔 적기도 한다. 생명은 A, T, G, C 네 개의 글자로 정보를 저장한다. 4진법이다. 사람 한 명의 유전 정보는 약 30억 개의 글자로 되어 있다. 이것을 컴퓨터 용량으로 바꾸면 1GB가 채 되지 않는다. 사람 한 명의 설계도가 USB 메모리 하나에 들어간다.

다음은 실행이다. 컴퓨터에서 실제로 동작하는 것은 사람이 쓴 소스 코드가 아니라 기계어 명령이다. 생명에서 실제로 일하는 것도 DNA가 아니라 단백질이다. 근육을 움직이고, 음식을 소화하고, 바이러스와 싸우는 것이 모두 단백질이다. 단백질은 20종의 아미노산을 줄줄이 이어 붙여 만든다. 생명은 4진법으로 저장하고 20가지 부품으로 실행한다.

저장하는 형태와 실행하는 형태가 다르니 둘 사이를 옮겨 주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 진법을 바꾸는 일을 언어 번역이라 한다. 컴퓨터에서는 컴파일러가 이 일을 맡는다. 사람이 쓴 소스 코드를 읽어 기계가 실행할 수 있는 명령으로 바꾼다. 생명에서는 리보솜이 이 일을 맡는다. 생물학도 이 과정을 실제로 ‘번역’이라고 부른다.

리보솜이 일하는 방식은 단순하다. 유전 정보를 세 글자씩 끊어 읽고, 세 글자마다 정해진 아미노산 하나를 골라 이어 붙인다. 어떤 세 글자가 어떤 아미노산이 되는지는 표 한 장에 정리돼 있다. 사람과 대장균과 옥수수가 거의 같은 표를 쓴다. 지구의 생명 대부분이 하나의 언어 규칙으로 컴파일되는 셈이다.

물론 둘이 똑같지는 않다. 컴파일러는 프로그램 전체를 미리 한꺼번에 바꿔 두지만, 리보솜은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유전자만 그때그때 읽어 단백질을 만든다. 그러나 정해진 규칙에 따라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긴다는 본질은 같다.

오류를 다루는 방식도 닮았다. DNA를 복사하는 효소는 잘못 붙인 글자를 스스로 찾아 고친다. 복사가 끝난 뒤에도 틀린 글자를 찾아 고치는 장치가 따로 일한다. 이 장치가 고장 나면 오류가 쌓인다. 쌓인 오류가 세포 분열을 멈추게 하는 유전자를 망가뜨리면 세포는 멈추지 않고 불어난다. 그것이 암이다. 암은 생명의 코드에 쌓인 오류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개발자는 이 분야에서 낯선 사람이 아니다. 정보를 저장하고, 번역하고, 실행하고, 오류를 고치는 일은 개발자가 매일 해 온 일이다. 바뀌는 것은 재료다. 생명과 컴퓨터가 같은 원리 위에 서 있으니, 생명의 하나인 사람과 컴퓨터가 닮은 것도, 컴퓨터의 연산량을 늘려 사람처럼 말하는 AI를 만든 것도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산업은 이 유사성을 먼저 증명했다. 삼성은 반도체 공장을 돌리며 쌓은 방식을 그대로 가져와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세웠다. 의약품을 만들어 본 적 없는 회사였다. 그러나 먼지 하나 없는 무균 공정, 미세한 변수를 잡는 공정 관리, 수율을 끌어올리는 통계적 관리, 대형 공장을 빠르게 짓는 능력은 반도체에서 이미 갖추고 있었다. 이 회사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 회사가 됐다. 반도체를 카피해 바이오를 만들 수 있을 만큼 두 공정은 닮아 있다.

닮은 것은 공장만이 아니다. 최근 나온 유전자 해독 장비 가운데 일부는 반도체 웨이퍼 위에서 DNA를 읽는다. 생명을 읽는 기계가 실리콘 위에서 돌아간다. 실리콘을 다루던 회사가 세포를 다루는 회사로 건너갔다면, 실리콘 위에서 코드를 짜던 사람이 세포의 코드로 건너가지 못할 이유도 없다.

설계 파일을 보내면 일주일 뒤 물건이 온다

하드웨어를 만드는 과정은 이렇다. 개발 키트와 모듈을 사서 원하는 프로그램을 올리고 돌려 본다. 동작이 확인되면 회로를 줄이고 부품을 모아 집적한 뒤 PCB 아트웍을 한다. 설계 파일을 PCB 제작 업체에 보내면 일주일 안에 직접 그린 모양 그대로의 기판이 도착한다. 비용은 얼마 들지 않는다.

하드웨어를 직접 만들어 본 사람은 이 구조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꿨는지 안다. 공장을 갖지 않아도 물건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아이디어와 실물 사이의 거리가 일주일로 줄었다. 설계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제조사가 될 수 있다.

바이오에서도 같은 구조가 갖춰지고 있다. 첫 단계는 읽기다. 2001년 사람 유전체 한 벌을 읽는 데 약 9,500만 달러가 들었다. 2026년 2월 엘리먼트 바이오사이언스는 유전체 한 벌을 100달러에 읽는 장비를 내놓았다. 25년 만에 비용이 약 100만분의 1로 떨어졌다. 반도체의 무어의 법칙보다 가파른 하락이다.

두 번째 단계는 쓰기다. 원하는 DNA나 RNA 서열을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합성 업체가 만들어 보낸다. 세 번째 단계는 생산이다. 설계한 물질을 의약품 기준에 맞춰 대량으로 만들어 주는 위탁생산 회사가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읽고, 설계하고, 주문하고, 받는다. PCB와 같은 순서다.

이 순서가 실제로 한 아이를 살렸다. 2024년 8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난 KJ 멀둔은 CPS1 결핍증을 안고 태어났다. 몸에서 암모니아를 처리하는 효소가 만들어지지 않는 희귀 유전병이다. 이 병을 가진 신생아의 절반가량이 생후 일주일 안에 숨진다. 원인은 30억 개의 문자 가운데 단 하나의 오류였다.

필라델피아 아동병원의 레베카 아렌스-니클라스와 펜실베이니아대의 키란 무수누루가 이끄는 팀은 KJ의 돌연변이만 겨냥한 염기편집 치료제를 설계했다. 염기편집은 DNA 가닥을 끊지 않고 틀린 문자 하나만 바꿔 쓰는 기술이다. 표적 위치를 찾아가는 가이드 RNA, 편집 단백질을 만드는 mRNA, 이것을 간까지 실어 나르는 지질나노입자는 생산 업체가 만들었다.

설계부터 생산까지 6개월이 걸렸다. 유전자 편집 치료제의 통상적인 개발 기간보다 세 배 빨랐다. KJ는 생후 6개월이던 2025년 2월 첫 투여를 받았고 이후 두 차례 더 투여받았다. 단백질을 더 먹을 수 있게 됐고 감기도 큰 탈 없이 넘겼다.

속도에는 이유가 있었다. 연구팀은 KJ가 태어나기 전부터 간을 표적으로 하는 편집 치료제를 빠르게 만드는 절차를 연습해 왔다. 모의 개발을 거듭하며 매번 기간을 몇 달씩 줄였다. 운반체처럼 여러 환자에게 공통으로 쓰는 부품은 임상에서 검증된 것을 쓰고, 환자마다 달라지는 부분에 시간을 집중했다. 개발 절차 자체를 미리 다듬어 둔 것이다.

이 약은 KJ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다. 아렌스-니클라스는 이 약이 다른 사람에게 쓰일 일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사람의 유전 서열에 맞춰 한 번 빌드하고 끝나는 약이다.

이 과정의 단계 대부분은 컴퓨터 위에서 일어난다. 유전체를 읽고 돌연변이를 찾는 일은 대용량 서열 데이터 분석이다. 가이드 RNA를 설계하는 일은 30억 글자 안에서 원하는 위치에만 정확히 붙고 다른 곳에는 붙지 않는 스무 글자 남짓의 서열을 찾는 문자열 탐색이다. 연구팀은 KJ의 돌연변이를 담은 서열을 합성해 배양한 간세포에 넣고 치료제를 먼저 시험했다. 환자와 같은 조건을 세포에 재현한 테스트 환경이다.

제도도 따라오고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2026년 2월 환자 한 명 또는 극소수를 위한 개별화 치료제의 효과와 안전성을 입증하는 방법을 담은 지침 초안을 냈다. 무작위 대조 임상이 불가능한 경우에도, 질병의 원인이 분명하고 치료제가 그 원인을 직접 겨냥한다면 기전에 대한 근거와 소규모 임상 자료로 효과를 입증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새 승인 경로가 생긴 것은 아니다. 기존 승인 기준은 그대로다. 그러나 한 사람을 위한 약이 예외적 사례에 머물지 않고 제도 안으로 들어올 방법이 처음으로 문서로 정리됐다. 규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산업이 커질 준비가 됐다는 신호다.

지침이 겨냥하는 것도 같은 구조다. 공통 부품은 한 번 검증해 두고 환자마다 바뀌는 서열만 새로 설계하는 방식이 굳어지면, 약 하나를 만드는 일은 공통 부품 위에 새 서열을 얹는 일이 된다. 바뀌는 부분이 서열이라는 것은 바뀌는 부분이 데이터라는 뜻이다.

깃랩 창업자는 자기 암을 어떻게 다뤘나

유튜브 인터뷰로 처음 접한 깃랩 창업자의 이야기는 사실관계를 다시 확인해 보니 더 흥미로웠다. 깃랩 공동창업자 시드 시브랜디는 2022년 11월 흉추 5번 척추뼈에서 골육종 진단을 받았다. 희귀하고 공격적인 뼈암이다. 표준 치료를 받았지만 2024년 재발했고, 표준 치료로 쓸 수 있는 선택지가 바닥났다. 재발한 골육종의 5년 생존율은 20~30%에 그친다.

그 뒤로 그가 한 일은 소프트웨어 회사를 운영하던 방식 그대로였다. 본인은 이를 ‘파운더 모드’라고 불렀다. 먼저 진단을 최대한으로 늘렸다. 단일세포 시퀀싱, DNA와 RNA 시퀀싱, 공간 전사체 분석, 잔존 암 검사, 영상 자료를 시간에 따라 반복해서 쌓았다. 원인을 모르는 문제 앞에서 관측부터 늘린 것이다.

쌓인 데이터는 25TB 안팎에 이르렀다. 그는 이 데이터를 개인정보를 지운 뒤 osteosarc.com과 아마존 클라우드의 공개 데이터 저장소에 올렸다. 자기 몸의 기록을 오픈소스로 공개한 셈이다. 깃랩을 오픈소스 회사로 키운 사람다운 선택이었다.

데이터는 답을 줬다. 단일세포 분석에서 그의 종양 세포와 주변 섬유아세포가 FAP라는 단백질을 많이 만든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골육종에 승인된 FAP 표적 치료는 없었다. 그는 2025년 초 독일로 가서 FAP를 겨냥한 방사성 의약품 치료를 받았다. 이후 남은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다음 과제는 재발을 막는 일이었다. 팀은 환자 본인의 종양에만 있는 변이 단백질을 면역계가 알아보고 공격하도록 훈련하는 맞춤형 mRNA 백신을 택했다. 코로나19 백신과 같은 기술이다.

휴스턴 감리교병원은 2026년 5월 골육종을 위한 첫 맞춤형 mRNA 암 백신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FDA의 동정적 사용 승인으로 가능했다. 종양 시퀀싱부터 신생항원 선별, 백신 제조까지 모든 단계를 병원 안에서 4개월 만에 끝냈다. 연구팀은 후보를 하나만 정해 밀어붙이지 않았다. 여러 후보를 설계하고 합성해 사람 세포에서 먼저 시험한 뒤 RNA 합성으로 넘어갔다.

시브랜디는 첫 논의부터 첫 투여까지 6개월이 걸렸고, 그 사이 192개의 설계 변형을 최적화했다고 밝혔다. 첫 투여부터 면역 반응이 나타났고 그는 치료를 잘 견디고 있다. 완치를 말하기에는 이르다. 그러나 표준 치료가 손을 놓은 환자가 데이터와 설계로 시간을 벌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거친 과정을 다른 환자도 쓸 수 있도록 ‘퓨처 오브 캔서 케어 투데이’라는 무료 서비스를 열었다. 표준 치료 밖의 진단법과 치료법 가운데 환자 상황에 맞는 것을 찾아 주는 서비스다. 그는 한 의료진이 따라갈 수 있는 양보다 쓸 수 있는 과학이 더 많다고 설명했다. 한 번 풀어낸 문제를 다른 사람도 쓰도록 만드는 것 역시 개발자의 습관이다.

그는 혼자 약을 만들지 않았다. 유전학자 제이컵 스턴이 실무를 이끄는 팀을 꾸렸고, 병원과 연구소와 생산 시설을 연결했고, 분석에 챗GPT 같은 AI를 썼다. 그가 이 팀에 가져온 것은 생물학 학위가 아니었다. 관측을 늘리고, 여러 실험을 동시에 돌리고, 데이터로 다음 수를 정하고, 결과를 공개하는 일하는 방식이었다.

그의 팀은 열 가지가 넘는 맞춤 치료 구상을 동시에 진행하며 효과가 보이는 쪽으로 무게를 옮겼다. 한 번에 하나씩 시도하고 실패하면 다음으로 넘어가는 기존 치료 방식과 정반대다. 여러 가설을 병렬로 돌리고 지표로 판단하는 것은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운영해 본 사람에게 가장 익숙한 일이다.

한 사람의 실험은 대형 제약사의 성과와 맞물리고 있다. 머크와 모더나는 2026년 8월 환자 맞춤형 mRNA 신생항원 치료제 인티스메란을 면역항암제 키트루다와 함께 쓴 3상 임상에서 흑색종 재발 없는 생존 기간이 유의하게 늘었다고 발표했다. 1,137명이 참여한 시험이었다. 개인 맞춤형 신생항원 치료로는 첫 3상 성공이다.

환자마다 다른 약을 만든다는 것은 환자마다 설계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돌린다는 뜻이다. 종양과 정상 조직의 서열을 읽고, 둘의 차이를 찾고, 그중 면역계가 알아볼 만한 조각을 예측하고, 그 조각을 mRNA 서열로 옮긴다. 이 과정 전체가 데이터 처리다. 환자가 늘어날수록 이 처리를 더 빠르고 싸고 정확하게 만드는 사람이 필요해진다.

단계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렇다. 종양과 정상 조직의 서열을 비교해 종양에만 있는 변이를 찾는다. 변이가 만들어 내는 짧은 단백질 조각 가운데 환자의 면역 유전자형에 맞아 세포 표면에 올라갈 만한 것을 예측 모델로 골라낸다. 후보에 순위를 매기고 상위 수십 개를 하나의 mRNA 서열에 이어 붙인다. 서열을 최적화하고 합성 업체로 보낸다. 모든 단계의 입력과 출력이 문자열과 숫자다.

지금 맞춤 치료가 비싸고 느린 이유의 상당 부분은 이 과정이 아직 사람 손을 많이 타기 때문이다. 4개월에서 6개월 걸리는 시간을 몇 주로 줄이는 일, 환자 한 명에 들어가는 비용을 일반 약값 수준으로 낮추는 일은 실험실보다 소프트웨어에서 먼저 풀릴 가능성이 크다. 사람 손으로 하던 일을 자동화해 비용을 무너뜨리는 것이 개발자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해 온 일이다.

근 미래의 장면은 이렇다. 암에 걸린 사람이 바이오코더를 찾아온다. 바이오코더는 종양을 시퀀싱하고, 데이터를 분석해 필요한 물질을 설계하고, 설계 파일을 바이오 공장에 보낸다. 일주일 뒤 앰플이 도착하고 의료진이 환자에게 투여한다. PCB 기판을 받아 보는 일이 생명에서 일어난다. 이미 4개월까지 줄어든 시간을 일주일로 만드는 것이 남은 숙제다.

컴퓨터공학은 처음부터 쉬웠는가

물론 장벽은 높다. 생물학, 생화학, 분자세포생물학, 생물물리학을 공부해야 한다. 이 과목들은 바이오코딩의 기본 알파벳이다. 건너뛸 방법이 없고, 모조리 공부해야 이 분야에 들어설 수 있다. 그래서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은 해 본 적도 없는 일을 어떻게 하느냐며 혀를 내두른다.

다른 직종은 각자 길을 찾을 것이다. 여기서는 개발자에게만 묻는다. 컴퓨터공학은 처음부터 쉬웠는가? 공부할 양이 적었는가?

상위 3% 안에 드는 개발자 가운데 컴퓨터 구조, 운영체제, 자료구조, 네트워크를 깊이 모르고 이 일에 들어선 사람은 없다. 그들은 20년 전 밤을 새우며 그것을 익혔다. 처음 포인터를 배우던 날의 막막함은 처음 세포 신호 전달 경로를 보는 날의 막막함과 다르지 않았다. 20년 전의 강도로 새 분야를 공부하면 된다. 이미 한 번 해 본 일이다.

게다가 지금은 20년 전보다 배우기가 훨씬 쉽다. 개발자의 일을 가져간 바로 그 AI가 생물학을 가장 참을성 있게 가르쳐 주는 선생이 된다. 모르는 효소 이름을 묻고, 논문의 실험 설계를 해설받고, 분석 코드를 함께 짤 수 있다. 시브랜디의 팀도 자기 종양 데이터를 이해하는 데 AI를 썼다.

도구도 열려 있다. 2024년 노벨 화학상은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알파폴드를 만든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와 존 점퍼, 그리고 단백질을 새로 설계하는 방법을 연 워싱턴대의 데이비드 베이커에게 돌아갔다. 서열을 넣으면 구조가 나오고, 원하는 기능을 정하면 서열을 설계해 주는 도구가 연구자들에게 공개돼 있다. 시브랜디의 데이터처럼 실제 환자 데이터도 누구나 내려받을 수 있다.

왜 하필 바이오인가? AI가 코딩을 가져갔다면 생물학도 곧 가져가지 않겠느냐는 질문이 남는다. 차이는 검증에 있다. 코드는 컴퓨터 안에서 실행해 보고 맞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AI가 빨리 배웠다. 생명은 세포에 넣고, 동물에 넣고, 사람에게 투여해 봐야 결과를 안다. 그 과정에는 물리적 시간과 규제와 책임이 따른다.

설계는 AI가 빠르게 도와줘도, 설계를 실험으로 옮기고 결과를 해석해 다시 설계로 돌리는 순환은 오랫동안 사람이 붙잡고 있어야 한다. 그 순환을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고, 드문 일에는 값이 매겨진다. 수요도 끝이 없다. 사람은 계속 병에 걸리고 몸은 계속 늙는다. 줄어드는 시장과 늘어나는 시장 중 어디에 서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시작할 곳도 많다. 시퀀싱 데이터 분석 파이프라인, 실험 자동화 소프트웨어, 단백질과 RNA 설계 도구, 임상 데이터 처리가 모두 개발자의 손을 기다린다. 처음부터 실험복을 입을 필요는 없다. 코드에서 출발해 세포로 넓혀 가면 된다.

실험도 점점 코드가 되고 있다. 로봇이 피펫을 잡고 정해진 절차대로 시약을 옮긴다. 실험 절차를 스크립트로 적어 원격 실험실에 보내면 결과 데이터가 돌아오는 서비스도 이미 있다. 실험실과 개발 환경 사이의 거리는 해마다 줄고 있다.

공부의 순서는 단순하다. 분자세포생물학 교과서 한 권으로 전체 지도를 먼저 그린다. 생화학으로 그 지도 위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이해한다. 그다음 공개된 시퀀싱 데이터 하나를 골라 분석 파이프라인을 직접 돌려 본다. 모르는 것이 나올 때마다 AI에게 묻고 교과서로 돌아간다. 개발자가 새 언어를 익히던 방식과 다르지 않다.

바이오 쪽에서 개발자가 필요한 이유도 분명하다. 생물학자는 데이터를 만드는 법을 알지만 그 데이터를 대규모로 처리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개발자는 시스템을 만들 줄 알지만 세포를 모른다. 둘 다 아는 사람은 드물다.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사라진 희소성이 바로 여기에 남아 있다.

개발자가 바이오로 가져갈 것은 코딩 실력만이 아니다. 버전 관리, 자동화된 테스트, 재현 가능한 빌드, 코드 리뷰 같은 습관이다. 소프트웨어 업계는 “내 컴퓨터에서는 되는데”라는 문제와 수십 년 동안 싸우며 이 습관을 만들었다.

생물학은 바로 그 문제를 앓고 있다. 2012년 미국 제약사 암젠의 글렌 베글리 연구팀은 암 연구의 주요 논문 53편을 재현하려 했지만 6편에서만 결과를 확인했다. 실험 조건과 분석 절차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탓이 컸다.

분석 파이프라인을 코드로 관리하고, 데이터와 절차의 버전을 남기고, 누가 돌려도 같은 결과가 나오게 만드는 일은 개발자에게 기본기다. 바이오에서는 아직 드문 능력이다. 깃랩을 만든 사람이 자기 암 데이터를 공개 저장소에 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판 밖에서 보면

해가 기울면 공원의 장기판도 정리된다. 진 사람은 말을 통에 쓸어 담으며 아까 그 수만 아니었으면 하고 중얼거리고, 이긴 사람은 남은 막걸리 잔을 비운다. 구경꾼들은 한마디씩 보태고 흩어진다. 그날 판을 가장 잘 읽은 사람은 끝내 말 한 번 쥐어 보지 않은 구경꾼들이었다.

판 밖의 눈은 공간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시간에서도 생긴다. 지나간 주가 그래프를 펼쳐 놓으면 누구나 앞일을 다 아는 사람이 된다. 여기서 샀어야 했고 저기서 팔았어야 했다. 그래프 위의 그 순간에 서 있던 사람에게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길이, 결과를 아는 사람의 눈에는 너무나 분명하다.

백 년 뒤의 사람들은 지금을 그런 눈으로 내려다볼 것이다. 그들의 눈에 소프트웨어 개발과 바이오코딩은 같은 일이다. 하나는 실리콘에, 다른 하나는 세포에 정보를 저장하고 번역하고 실행하는 일이었다. 같은 문법을 다른 종이에 쓰는 일이었다. 그들은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바로 옆 햇볕 드는 체스판이 비어 있었는데 왜 그쪽으로 건너가지 않았을까? 왜 붐비는 장기판 앞에 끝까지 남아 서로를 밀어내며 싸웠을까?

그 질문에 내놓을 변명은 있다. 판 위에 있으면 판이 보이지 않았다고. 익숙한 길을 버리기 어려웠다고. 새 언어를 처음부터 배우기에는 늦었다고 여겼다고. 그러나 백 년 뒤의 사람들에게 그 변명은 눈앞의 한 걸음만 보던 졸의 사정으로만 들릴 것이다.

다행히 사람은 말이 아니다. 말은 판이 접히면 통 속으로 쓸려 들어가지만, 사람은 일어나 한 걸음 물러설 수 있다. 물러서서 판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고, 판을 떠나 다른 판으로 걸어갈 수 있다. 판 위의 말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단 하나의 수, 판을 바꾸는 수가 사람에게는 있다.

체스판은 아직 비어 있다. 햇볕은 넉넉히 들지만 앉은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나면 늦게 온 사람이 앉을 곳은 많지 않다. 지금이 그 판 앞에 먼저 앉을 수 있는 때다. 20년 전 밤을 새워 컴퓨터의 문법을 익혔던 사람이라면 생명의 문법도 익힐 수 있다. 좁아지는 판에서 손을 떼고 새로운 도구를 들면 된다.

훗날 누군가 지금을 돌아보며 훈수를 둔다면, 그 말이 탄식보다 감탄에 가깝기를 바란다. 그때 그들은 붐비는 장기판을 떠나 햇볕 드는 체스판에 앉았다고.

실리콘에 코드를 쓰던 손은 생명에도 코드를 쓸 수 있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