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예측하거나 보이지 않는 곳의 방향을 잡을 때 역사만 한 지표는 없다.

한국은 5000년 역사를 통틀어 지금 가장 작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경제 규모는 세계 15위이고, 문화적 영향력은 역사상 어느 시기와도 비교되지 않는다. 이 성취가 특별한 이유는 반쪽의 몸으로 이뤄냈기 때문이다. 좌뇌와 우뇌를 잇는 다리가 끊어진 채 서로 다른 자아를 가진 두 개의 몸처럼, 남과 북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따로 살고 있다. 통일은 지금 세대에게 희망 고문에 가까워 보일 정도다. 그 반쪽짜리 몸으로 여기까지 온 것은 냉정하게 봐도 대단한 일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미 신호는 나오고 있다. 한국의 명목 GDP 순위는 2023년 13위에서 올해 15위로 내려왔다. 경제 규모 자체가 줄어서가 아니라 다른 나라가 더 빨리 커졌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이 AI를 놓고 정면으로 부딪히는 판에서 잠깐 머뭇거리거나 판돈을 잘못 걸면, 반쪽인 몸은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꺼질 수 있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이 성장한 방식은 남이 먼저 연 시장에 더 좋은 물건을 더 싸게 넣는 것이었다. 그 방식이 통하려면 시장이 열려 있어야 하고, 우리가 들어갈 자리가 남아 있어야 한다. 지금 열리는 시장에서 그 자리가 어디인지가 문제다.

그래서 질문은 하나로 좁혀진다. 이 판에서 한국이 걸 수 있는 판돈은 무엇인가?

답부터 적는다. 소프트웨어가 아니다. 파운데이션 모델은 우리가 안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 수 없다. 의지나 애국심의 문제가 아니라 연산 자원과 사람과 시장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동시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걸 수 있는 판은 하드웨어 하나뿐이다. 그런데 지금 그 하드웨어조차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라는 두 개의 점으로만 존재한다. 판돈을 하드웨어로 옮기고, 그 하드웨어를 점이 아니라 생태계로 만드는 것. 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중국의 150년은 예외였다

우리가 낮춰 보는 중국은 최근 150년의 중국일 뿐이다. 중국이라는 국호 자체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이후의 것이고, 그 이전은 한·송·원·명·청처럼 중원의 땅을 차지한 패권국들의 이야기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볼 때, 세계에서 가장 좋은 물건은 대부분 그 땅에서 만들어졌다. 비단과 도자기와 차는 수천 년짜리 스테디셀러였고, 유럽은 그것을 사기 위해 은을 실어 날랐다. 아편전쟁 이후의 한 세기 반이 예외였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 중국이 AI에서 앞서 나가는 것은 긴 역사에서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잠시 삐끗했던 힘이 돌아오는 데 몇십 년이 걸렸을 뿐이다.

돌아온 자리의 크기는 제조에서 드러난다. 중국은 전 세계 제조업 부가가치의 30% 안팎을 차지한다. 일본과 독일과 한국과 인도와 멕시코와 이탈리아와 프랑스와 영국을 다 합친 것보다 크다. 흔히 중국이 봉제 같은 저부가 제조를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넘겼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그런데 넘긴 것은 조립이다. 거기 들어가는 바늘과 실과 원단은 여전히 중국이 쥐고 있다. 유엔 산업 분류의 모든 대분류에 걸쳐 생산 능력을 갖춘 나라는 지구상에 중국 하나뿐이다.

한국이 중국보다 나은 제조 강국인가? 다른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우리는 제조 강국이 맞다. 그러나 중국과 비교하면 우리가 가진 것은 몇 개의 완성품 산업이다. 반도체와 조선과 자동차와 배터리에서 세계 상위권이지만, 그 산업에 들어가는 부품과 소재와 장비를 국내에서 다 조달하지 못한다. 중국은 완성품과 그 아래 단계를 함께 가지고 있다. 이 차이는 호황일 때는 보이지 않다가 공급망이 끊길 때 한 번에 드러난다.

진짜 무서운 지점은 따로 있다. 중국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에서 미국을 따라잡았다. 미국이 40년 동안 단 한 번도 1위를 내주지 않았던 분야다.

미국은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며 제조업이 무너졌다. 1985년 플라자 합의로 뒤늦게 제조업을 되살리려 했지만, 조립 공정은 한국과 대만이 가져갔고 미국은 자동차를 빼면 하드웨어 제조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나라가 됐다. 대신 미국은 소프트웨어를 택했다. 실리콘밸리에서 벌어진 일의 속도와 파급력은 혁명이라 불러도 과하지 않다. 1930년대 포드주의 생산 방식으로 대중 소비 사회를 만든 나라가, 1990년대와 2000년대를 넘어서며 대중 인터넷 시대까지 만들었다. 미국을 폄하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만한 파급력을 이만한 시간 안에 만들어낸 나라가 또 있었는지 묻고 싶다.

한국은 그 소프트웨어 패권 아래에서 자국 서비스로 방어에 성공한 드문 나라였다. 검색과 메신저와 커머스에서 네이버가 30년 가까이 자리를 지켰다. 세계적으로 흔한 일이 아니다. 유럽에서는 체코의 Seznam 정도가 남았을 뿐이고, 그마저 한때 과반이던 점유율이 10%대로 내려앉았다.

그런데 그 방어선이 지금 무너지고 있다. 네이버는 여전히 국내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검색 서비스지만 점유율은 40% 아래로 내려왔다. 챗지피티를 최근 석 달 안에 써본 사람은 이미 절반을 넘었고, 만족도와 유료 이용 의향에서는 구글 제미나이가 챗지피티마저 앞질렀다. 뉴스와 생활 정보 검색은 아직 네이버가 쥐고 있지만, 지식 습득과 업무 목적의 검색은 생성형 AI 쪽으로 넘어갔다. 더 결정적인 것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이용자가 포털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AI로 옮겨 간다는 점이다. 이용자가 이미 AI 생태계 안에서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30년을 버틴 방어선이 3년 만에 흔들리고 있다.

검색만의 문제도 아니다. 메신저 안의 검색 기능은 이용자가 빠지고 있고, 커머스와 콘텐츠 추천은 결국 모델 성능에서 갈린다. 이 회사들이 자체 모델을 만들지 않은 것도 아니다. 네이버클라우드는 정부의 독자 모델 정예팀에 선정됐다가 첫 단계평가에서 탈락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한국어 데이터를 가진 회사가 그랬다. 이것을 한 회사의 실패로 읽으면 안 된다. 한국이 가진 조건에서 나올 수 있는 결과가 그것이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중국은 어떤가? 방어에 성공한 정도가 아니다. 자국에서 만든 모델이 미국 모델보다 훨씬 싸다. 딥시크는 100만 토큰을 0.14달러에 처리한다. 그것도 가중치를 공개해 누구나 내려받아 자기 서버에서 돌릴 수 있게 해놓았다. 알리바바의 Qwen은 허깅페이스 누적 다운로드에서 메타의 라마를 넘어섰다. 오픈라우터가 처리하는 토큰 가운데 중국산 오픈웨이트 모델의 비중은 2024년 말 사실상 0에서 지금은 과반이다. 같은 기간 시장 자체가 네 배로 커졌으니, 커진 시장의 절반을 새로 가져간 셈이다.

방식도 지독하다. 미국이 만들고 미국이 키운 오픈소스 진영의 규범을 그대로 가져다, 자기 모델의 가중치를 공짜로 뿌리면서 미국 빅테크의 유료 API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노골적인 반도체 제재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이 가격 구조가 만들어내는 결과를 봐야 한다. 모델을 공짜로 뿌리면 모델 자체로는 돈을 벌지 못한다. 그런데 그 모델 위에서 돌아가는 서비스와 그 모델을 돌리는 인프라에서는 돈이 벌린다. 중국은 모델을 원가에 가깝게 풀어 미국 빅테크의 유료 매출을 깎으면서, 자국 클라우드와 자국 칩과 자국 서비스로 그 아래를 채우고 있다. 소프트웨어를 무기로 쓰되 회수는 하드웨어와 서비스에서 하는 구조다.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를 먼저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드웨어에서 중국이 앞서는 것은 40년 동안 예고된 일이었다.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는 달랐다. 미국의 우위는 자본과 인재와 생태계가 한곳에 모여 만들어진 것이라 다른 나라가 복제하기 어렵다고 여겨졌다. 그 전제가 3년 만에 깨졌다. 그것도 미국이 세운 규칙을 그대로 쓰면서 깨졌다.

여기서 한국이 소프트웨어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난 40년 동안 우리가 세계에서 앞섰던 분야에 소프트웨어가 있었던 적이 있는가?

파운데이션 모델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먼저 사실관계를 정확히 놓고 시작해야 한다. 정부의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 이른바 독파모의 성과는 조롱받을 수준이 아니다.

2025년 여름 다섯 개 정예팀으로 출발한 이 사업은 단계평가를 거칠 때마다 팀을 잘라내며 지금은 세 팀이 남았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다. 참여 팀의 모델은 모두 에포크AI가 관리하는 주목할 만한 모델 목록에 올랐고, 국제 지능 지수에서 유럽과 캐나다의 주요 모델을 앞질렀다. 모티프테크놀로지스의 Motif 3는 전 세계 AI 기업 기준 10위에 올랐다. SK텔레콤의 A.X K2는 올해 국제수학올림피아드 문제 평가에서 금메달 기준에 해당하는 점수를 냈다.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이 정도를 만들어낸 엔지니어들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문제는 실력이 아니다. 구조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못 만드는 것은 좋은 모델이 아니라 팔리는 모델이다.

첫째는 연산이다. 올해 상반기 정예팀에 지원된 엔비디아 B200은 768장이었다. 같은 시기 오픈AI가 굴린 물량은 H100 환산 기준 약 170만 장이다. 정부가 엔비디아와 발표한 26만 장 확보 계획 중 정부가 직접 쓸 몫은 5만 장인데, 그마저 독자 모델과 국가 AI 컴퓨팅 센터와 대학 연구용으로 나뉜다. 단일 학습 클러스터로 묶어 쓸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이 차이가 왜 결정적인지는 사전학습의 성격을 보면 안다. 대규모 언어 모델의 성능은 파라미터 수와 학습 데이터 양과 투입 연산량이 함께 늘어날 때 개선된다. 셋 중 하나만 키우면 나머지가 병목이 된다. 그래서 연산량은 아이디어로 우회할 수 있는 변수가 아니다. 알고리즘 효율을 개선하면 같은 성능을 더 적은 연산으로 낼 수는 있지만, 그 효율 개선은 경쟁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딥시크가 보여준 것도 미국 대비 절반이나 3분의 1의 연산으로 비슷한 성능을 낸 것이지, 수백 분의 1로 낸 것이 아니다. 차이가 두 배나 세 배면 노력과 재능으로 메운다. 수백 배는 종류가 다른 문제다.

돈의 단위도 짚어야 한다. 앤스로픽은 올해 5월부터 xAI의 클러스터를 빌려 쓰는 대가로 월 1조 7천억 원이 넘는 돈을 지불하기로 했다. 프론티어에서 모델을 만든다는 것은 이런 고정비를 매달 감당한다는 뜻이다. 한국의 어느 기업이 수익이 나지 않는 상태로 이 비용을 몇 년간 끌고 갈 수 있는가?

판이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독파모 정예팀이 평가를 받는 사이 딥시크와 문샷AI는 다음 세대 모델을 내놨다. 우리가 따라잡은 지점은 이미 상대가 떠난 자리다. 벤치마크 점수를 좁히는 것과 시장에서 선택받는 것은 다른 문제다.

둘째는 사람이다. 기술은 결국 사람이 만든다. 그런데 한국은 좋은 인재가 소프트웨어로 가지 않는다. 지난해 자연계열 정시에서 상위 1% 학생의 77%가 의대로 갔다. 판교에 가보면 개발자 평균 연령이 계속 올라가고 있다. 우리 20대가 왜 프로그래머가 되려 하지 않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숫자는 더 나쁘다. 국내 소프트웨어 인력은 지난해 0.2% 늘어나는 데 그쳤다. 사실상 제자리다. 기업들이 올해 뽑겠다고 한 인원 중 경력직이 신입의 세 배에 가깝다. 신입을 뽑지 않는 산업은 10년 뒤에 경력직이 없다.

더 고약한 것은 이 흐름을 만든 것이 AI 자신이라는 점이다. 신사업에 진출하면 개발자를 뽑아 팀을 키우던 방식이, 기존 직원에게 AI 도구를 쥐여주고 업무 범위를 넓히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신입이 배우면서 하던 일을 도구가 먼저 처리한다. 개발자가 각광받던 시기에 전공을 고른 청년들이 지금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이 상태에서 20대에게 프로그래머가 되라고 권할 근거가 무엇인가? 인재가 의대로 가는 것을 개인의 잘못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지금 이 구조를 바로 고친다 해도 한 세대, 즉 30년이 지나야 소프트웨어의 기초 체력이 생긴다. 이렇게 격변하는 시기에 30년을 기다릴 수 있는가?

셋째가 가장 결정적이다. 시장이다.

독자 모델이 세계에서 쓰이려면 성능이 최고이거나 값이 압도적으로 싸야 한다. 중국은 후자를 택했다. 최고 모델과 몇 점 차이 나는 성능을 10분의 1 가격에 판다. 성능이 조금 떨어져도 가격이 그 정도면 쓸 이유가 생긴다. 한국 모델은 어느 쪽도 아니다.

그렇다고 국내용이면 되지 않느냐는 말도 성립하지 않는다. 글로벌 모델은 이미 한국어를 잘한다. 그리고 상당 부분 무료다. 클로드나 챗지피티를 제쳐두고 성능이 떨어지는 한국 모델을 돈 내고 쓸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어떤 메리트도 없이 공짜로 줘도 오픈AI나 구글의 무료 모델만 못한 것을 유료로 쓰라고 설득할 수 있는가?

여기서 소버린 AI라는 말이 나온다. 국가 안보와 데이터 주권을 위해 자국 모델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 자체는 틀리지 않다. 국방과 행정과 의료처럼 데이터가 국경을 넘으면 안 되는 영역이 분명히 있고, 거기에는 국내에서 통제 가능한 모델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목적이라면 세계 10위권을 다투는 범용 모델을 사전학습부터 다시 만들 필요가 없다. 공개된 오픈웨이트 모델을 가져와 국내 데이터로 다듬고 국내 인프라에서 돌리면 된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좋은 오픈웨이트 모델들은 전부 내려받을 수 있고 대부분 상업적 이용이 가능하다. 주권을 이유로 맨 앞 단계부터 다시 하겠다는 것은 목적과 수단이 어긋난 선택이다. 필요한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모델이지, 우리가 처음부터 만든 모델이 아니다.

여기서 곧바로 반론이 나온다. 중국 모델에 기대는 것이 무슨 주권이냐는 것이다. 이 질문은 의존의 종류를 구분하지 않은 데서 나온다. 남의 서버에 접속해 쓰는 것과 가중치를 내려받아 우리 서버에서 돌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앞의 경우 상대는 우리가 무엇을 묻는지 볼 수 있고, 값을 올릴 수 있고, 어느 날 연결을 끊을 수 있다. 뒤의 경우 상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물건이 이미 우리 손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가중치에 심어진 편향이나 검열은 실재하는 문제다. 그러나 그것은 뜯어보고 다시 학습시켜 고칠 수 있는 문제이지, 모델 자체가 없는 것과 비교할 일이 아니다. 어차피 우리는 ASML 장비 없이 최선단 반도체를 못 만들고 엔비디아 칩 없이 AI를 못 돌린다. 모든 의존을 없앨 수는 없다. 구분해야 할 것은 되돌릴 수 있는 의존과 그렇지 않은 의존이다. 내려받아 보관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의존은 앞쪽에 속한다.

여기서 더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독파모 모델들은 모두 오픈소스로 공개됐다. 좋은 일이고 국제적 인정도 받았다. 그런데 그 모델로 무엇을 파는가? 가중치를 공개했으니 라이선스 수익은 없다. 추론 서비스로 경쟁하자니 딥시크가 그 10분의 1 가격을 부른다. 성능이 좋은데 팔 곳이 없는 모델은 산업이 아니라 논문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인다. 독파모에 들어간 예산 자체가 나라를 흔들 규모는 아니다. 진짜 비용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 대규모 모델을 실제로 훈련해본 엔지니어는 한국에 많아야 수백 명 단위다. 이 인력이 어디에 배치되느냐가 앞으로 10년의 산업 지도를 바꾼다. 지금 그들은 만들 때마다 다음 평가에서 절반이 잘려 나가는 사업 안에서, 팔 곳 없는 모델을 만들고 있다. 정부도 이 구조를 인식했는지 새로운 지원 체계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그 논의의 출발점은 더 좋은 모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이 인력을 어디에 쓸 것인가여야 한다.

물건값이 0으로 가는 세계

이제 우리가 걸 수 있는 판을 보자.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가르는 기준은 하나다. 지금 우리 손에 무엇이 있느냐다. 소프트웨어 산업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포털과 게임과 기업용 시스템에서 쌓아온 것이 있다. 그러나 프론티어 모델은 그 위에 이어 붙일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일이다. 연산도 인재도 시장도 지금 가진 것과는 다른 종류를 처음부터 갖춰야 한다. 하드웨어에서는 이미 세계 1위를 쥔 회사와 공장과 숙련된 사람이 있다. 새로 시작하는 일과 가진 것을 넓히는 일은 난이도가 다르다. 판을 고를 때 이 차이보다 중요한 기준은 없다.

AI가 만들어내는 진짜 변화는 대화나 문서 작성이 아니다. 생산에 들어가는 지능의 비용이 0을 향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물건을 만드는 비용은 재료비와 설비비와 인건비로 나뉘었다. 이 가운데 사람이 판단하고 조작하는 데 드는 비용이 가장 크고 가장 줄이기 어려웠다. 자동화는 늘 정해진 동작을 반복하는 영역에서만 가능했고, 조금이라도 상황이 달라지면 사람이 개입해야 했다. AI가 그 판단의 자리를 대신하면 남는 것은 재료와 전기뿐이다.

여기서 한국에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나온다. 부채다.

지금 세계의 화폐는 부채 위에 서 있다. 한국도 다르지 않고, 가계와 국가 부채는 계속 쌓이는데 인구는 줄고 있다. 통상적인 해법은 성장으로 갚거나 인플레이션으로 녹이는 것인데 둘 다 지금 한국에서는 쉽지 않다. 성장은 둔화됐고, 인플레이션은 부채를 줄여주는 대신 국민의 생활을 먼저 무너뜨린다.

그런데 생산이 폭발하면 계산이 달라진다. 물가가 오르는 국면에서도 물건 자체가 흔해지면, 같은 부채가 실제로 짊어지는 무게는 가벼워진다. 부채의 액수는 그대로인데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의 양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와 조부모 세대에게 물으면 그 시절엔 물자가 귀했고 비쌌다고 답한다. 지금은 아프리카에서도 휴대폰을 쓰고, 굶어 죽는 인구는 확연히 줄었다. 물자가 흔해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줄인다. 소프트웨어가 사람에게 시간을 거의 무한히 준 것처럼, 생산의 폭발은 물질을 그렇게 만든다.

문제는 그 폭발을 무엇이 일으키느냐다. 여기서 휴머노이드가 나온다.

공장을 통째로 무인화하는 다크 팩토리는 오래전부터 이야기되어 왔지만 널리 퍼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잘 돌아가는 공장을 뜯어고치는 것은 비싸고 오래 걸리며, 생산 품목이 바뀔 때마다 다시 해야 한다. 반면 사람 모양의 기계가 사람이 하던 몇 가지 일만 대신하면, 기존 공장이 그대로 무인 공장이 된다. 공장의 통로 폭과 작업대 높이와 공구 손잡이는 이미 사람의 몸에 맞춰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 모양이라는 것은 디자인 취향이 아니라 기존 설비를 그대로 쓰기 위한 선택이다. 중국이 다크 팩토리보다 휴머노이드를 미는 이유가 여기 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특정 작업 전용 기계는 그 작업이 없어지면 쓸모가 사라진다. 반면 사람이 하던 일을 하는 기계는 한 종류를 만들어 여러 공정에 투입할 수 있다. 쓰임새가 많아질수록 생산 대수가 늘고, 생산 대수가 늘수록 한 대당 원가가 내려간다. 전용 기계로는 만들 수 없는 규모의 경제가 여기서 생긴다. 중국이 휴머노이드를 핵심으로 미는 이유는 그것이 멋있어서가 아니라 이 계산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은 이미 만들고 있다. 올해 상반기 전 세계에 출하된 휴머노이드의 97% 이상이 중국산이었다. 1위는 즈위안로보틱스이고 유니트리가 그 뒤를 잇는다. 유니트리의 생산량은 2024년 545대에서 2025년 5,700여 대로 1년 만에 열 배가 됐다.

물론 거품도 섞여 있다. 지금 생산되는 휴머노이드의 상당수는 실제 생산 현장이 아니라 데이터를 모으기 위한 훈련 시설로 들어가고, 중국 로봇 업체 매출의 큰 부분은 지방정부가 지원하는 훈련 센터 수주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낭비로 볼 수는 없다. 로봇이 실제 세계에서 일하려면 실제 세계의 데이터가 필요한데, 그 데이터는 로봇을 굴려야만 나온다. 지금 중국이 사고 있는 것은 로봇이 아니라 데이터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자율주행차와 휴머노이드는 같은 기계다. 일론 머스크가 말했듯 작동 원리가 다르지 않다. 전기로 움직이고, 카메라로 보고, 모터로 관절을 돌린다. 자율주행차는 바퀴 달린 휴머노이드다. 그래서 자율주행에서 앞서는 나라가 휴머노이드에서도 앞선다. 지금 그 나라는 중국이다.

미국 자율주행 분석업체 AUTNMY AI가 12시간마다 갱신하는 로보택시 지수를 보면 바이두 아폴로고와 웨이모가 1위와 2위를 주고받고, 그 뒤를 포니AI와 위라이드가 따른다. 상위 다섯 중 셋이 중국 기업이다. 테슬라는 5위이고 현대차그룹의 합작사 모셔널은 한참 아래에 있다.

테슬라가 5위라는 것이 뜻밖일 수 있다. 이 지수는 기술 시연을 보지 않는다. 자율주행 운영과 규모와 매출이 배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FSD를 켜고 달린 소비자 주행거리로는 테슬라가 압도적 1위다. 그러나 운전자 없이 요금을 받고 달린 거리는 아직 300만 킬로미터에 못 미친다. 같은 기준으로 바이두와 웨이모는 각각 3억 킬로미터 안팎이다. 100배 단위의 차이다. 감독자가 앉아 있는 주행과 아무도 타지 않은 주행은 다른 사업이다.

데이터를 쌓을수록 성능이 오르고, 성능이 오르면 더 많은 지역에서 운행 허가를 받고, 그만큼 데이터가 다시 쌓인다. 생성형 AI에서 벌어진 일이 도로 위에서 반복되고 있다. 미국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다. 테슬라는 옵티머스 양산을 앞두고 핵심 부품의 중국 의존도를 낮추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출하 대수의 격차는 이미 크다. 이 경쟁이 미국과 중국의 2파전으로 굳어지기 전에 한국이 어디에 설 것인지 정해야 한다.

자율주행이 한국 사회에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부동산을 보면 분명해진다. 서울에, 특히 강남에 살고 싶어 하는 이유를 뜯어보면 결국 인프라다. 교육과 직장과 문화 공간이 거기 몰려 있고, 그것을 누리려면 매일 스스로 운전해서 이동해야 하니 가까이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동이 완전히 자동화되면 어떻게 되는가? 움직이는 개인 공간 안에서 일하거나 쉬거나 영상을 볼 수 있다면, 출근에 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 자체가 비용이 아니게 된다. 스트레스 없이 이동해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것을 누릴 수 있다면, 강남에 살아야 할 이유의 상당 부분이 사라진다.

반대로 갈 수도 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철도와 지하철과 고속도로가 놓일 때마다 통근권은 넓어졌지만 도심 땅값은 오히려 올랐다. 이동이 쉬워지면 더 많은 사람이 그 중심을 원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의 이동은 여전히 사람이 운전대를 잡는 이동이었다. 이동 시간이 통째로 다른 용도로 바뀌는 상황은 아직 겪어본 적이 없다. 부동산은 정책으로만 잡는 문제가 아니라, 이동의 물리적 제약이 사라질 때 함께 움직이는 문제다.

이 판이 성립하는 데 조건이 하나 있다. 전기다. 지능의 비용이 0으로 가면 남는 비용은 재료와 전기인데, 전기를 비싸게 쓰는 나라에서는 이 계산이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중국은 이 답을 이미 만들어놨다. 재생에너지 설비가 전체 발전 설비의 60%를 넘겼고, 매년 한국 전체 규모의 몇 배씩을 새로 붙이고 있다. 운송을 전기로 바꾸고 원전을 늘리면서 석유 의존이라는 최대 약점을 지웠다. 한국은 신규 원전 부지를 올해에야 확정했다. 2002년 이후 24년 만이고, 준공 목표는 2037년이다. 정쟁으로 흘려보낸 시간의 청구서가 지금 오고 있다. 전기는 이 글의 결론이 아니라 전제다. 여기가 막히면 뒤의 이야기는 시작조차 할 수 없다.

두 개의 점으로는 생태계가 되지 않는다

한국이 AI에서 힘을 쓰고 있는 분야는 반도체 하나다. 그 하나로 역대급 실적이 나온다. 정부는 올해 성장률 전망을 2%에서 3%로 올렸다. 기록적인 반도체 수출 덕분이다.

그런데 같은 발표에서 취업자 증가 전망은 오히려 낮췄다. 청년 취업자는 44개월 연속 줄었고 청년 고용률은 26개월 연속 떨어졌다. 올해 연간 고용률은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하락할 전망이다. 정부 관계자의 설명은 간명하다. 반도체는 취업 유발 계수가 높지 않다는 것이다.

이유는 하나다. 한국의 AI 관련 산업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라는 두 개의 점이다. 점은 아무리 커도 면적이 없다. 그 아래에 부품과 소재와 장비와 인력이 두껍게 붙어 있어야 고용이 생기고 산업이 된다. 무엇이 빠졌는지는 중국과 나란히 놓고 보면 분명해진다.

중국의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 CXMT가 무서운 이유가 여기 있다. 기술이 아니라 생태계 때문이다.

CXMT의 공정 수준은 아직 뒤처져 있다. EUV 없이 구형 장비를 여러 번 겹쳐 찍고, HBM에서는 정면 승부가 어렵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그런데 올해 2분기 CXMT의 D램 매출은 1년 만에 여덟 배로 뛰었고 세계 점유율 4위에 올라섰다. 증설 계획대로라면 월 웨이퍼 생산 능력이 몇 년 안에 삼성전자에 육박한다.

기술이 뒤진 회사가 이렇게 크는 이유는 중국 안에서 다 팔리기 때문이다. 중국의 스마트폰과 PC와 서버 제조사가 수입하던 메모리를 CXMT 제품으로 바꾸면 그만이다. AI 수요가 폭발하면서 삼성과 하이닉스가 HBM과 서버용 D램에 생산 능력을 몰아주자 범용 D램에 공백이 생겼고, CXMT는 정확히 그 자리로 들어갔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CXMT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장비와 소재와 부품과 설계와 패키징까지 중국 안에서 국산화하겠다고 공언했다. 만든 칩을 사줄 완제품 회사가 있고, 그 칩 위에서 돌아갈 모델과 서비스를 만드는 회사가 있고, 그 칩을 찍을 장비와 소재를 대는 회사가 있다. 반도체 회사 하나가 아니라 그 회사를 둘러싼 생태계 전체가 같이 굴러간다. 기술이 한 회사에서 끝나지 않고 생태계 안을 돌면서 다음 기술을 만들어내는 구조다. 중국이 반도체와 로봇과 AI를 한꺼번에 미는 이유는 칩 하나를 잘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생태계 전체를 자기 나라 안에 두기 위해서다.

고용은 바로 그 생태계에서 나온다. 반도체 공장 자체는 사람을 많이 쓰지 않는다. 자동화가 가장 깊이 들어간 산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장에 장비를 넣고 소재를 대고 부품을 깎고 소프트웨어를 붙이는 회사들은 사람을 쓴다. 그것도 양질의 일자리를 만든다. 중국은 지금 그 일자리를 통째로 자기 안에 쌓고 있다.

한국에는 그 생태계가 없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최고지만 두 회사를 둘러싼 국내 생태계는 얇다. 기술이 두 회사 안에서 끝나고 밖으로 돌지 않는다. 중국이 안 사주고 미국이 안 사주는 순간, 우리 하드웨어를 받아줄 곳이 국내에 없다. 성장률과 고용이 반대로 가는 이유가 정확히 여기 있다.

반도체에서도 이 문제는 이미 드러나 있다.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이후 소재·부품·장비 국산화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고, 웨이퍼 생산과 증착 장비에서는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업도 나왔다. 그러나 노광과 이온 주입 장비는 여전히 국내에 전무하다. 최선단 공정 장비는 ASML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실패 확률이 큰 영역에는 손을 대지 않은 결과다.

로봇에서는 문제가 더 선명하다. 휴머노이드 제조 원가의 60% 이상은 액추에이터가 차지한다. 모터와 감속기로 이뤄진 관절이며, 한 대에 서른 개쯤 들어간다. 그런데 국내 로봇 업계의 부품 국산화율은 40%대에 머물러 있다. 지난해 말 국내 로봇 스타트업들은 중국산 기어 납기가 한 달에서 두세 달로 밀리는 일을 겪었다. 하모닉 감속기를 국내 최초로 국산화한 회사는 일본 제품보다 싸게 팔면서도 8년째 적자다.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주는 곳이 없어서다.

중국은 같은 구간을 이미 통과했다. 중국에서 조립되는 로봇에 들어가는 하모닉 기어의 자국산 비중은 6년 만에 5% 미만에서 35% 이상으로 올라갔다. 내수가 부품 회사를 키운 것이다.

부품 하나가 산업 전체를 쥘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어 있다. 일본의 나브테스코는 전 세계 산업용 로봇 생산량의 60% 안팎에 들어가는 감속기를 공급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관절 하나를 만드는 회사가 그 자리를 차지했고, 휴머노이드에서 같은 자리가 다시 열리는데 아직 승자가 없다. 한국에도 움직임은 있다. 감속기 세 종류를 모두 만드는 회사가 액추에이터 양산에 들어갔고, 하모닉 감속기를 국산화한 회사는 전용 공장을 짓고 있다. 미국 기업들이 공급망 불안을 이유로 중국산 부품을 줄이려는 흐름도 기회다. 문제는 이들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느냐다. 8년 적자를 견딘 회사가 몇 개나 더 나올 수 있는가?

배터리와 전기차에서는 이미 밀리고 있다. 국내 배터리 3사의 합산 세계 점유율은 1년 만에 37%에서 28%로 떨어졌고, 비중국 시장 인도량에서는 BYD가 현대차그룹을 제쳤다. 국내에서도 2,500만 원대 중국 전기차가 3,600만 원대 아이오닉5 옆에 놓였다.

정부가 방향을 못 잡은 것은 아니다. 10년간 약 1,350조 원을 반도체 팹과 AI 데이터센터와 휴머노이드에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2028년까지 국내 휴머노이드 시장 점유율을 1%에서 20%로 올리겠다는 목표도 내걸었다. 지금 1%라는 숫자가 현실이다. 현대차그룹은 보스턴다이내믹스 지분을 100% 확보했고, 차세대 아틀라스를 2028년부터 미국 공장에 투입해 2030년에는 조립 공정까지 맡긴다는 로드맵을 내놨다.

문제는 배분이다. 1,350조 원의 대부분이 반도체 팹과 데이터센터로 갔다. 반면 로봇 훈련소와 데이터 팩토리에 잡힌 예산은 1조 원대다. 짓는 것과 사는 것에는 돈이 몰렸고, 그 안을 채울 부품과 데이터와 사람에는 거의 붙지 않았다. 두 개의 점을 더 크게 만드는 데 돈을 쓰면 점이 커질 뿐 면적은 생기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팹 한 동이 아니라 수요다.

부품 회사가 죽는 지점은 기술 개발이 아니라 첫 납품이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검증 이력이 없으면 대기업 생산라인에 들어가지 못하고, 라인에 못 들어가면 검증 이력이 쌓이지 않는다. 이 고리를 끊어주는 것이 정책이 할 일이다. 국산 부품을 일정 비율 이상 쓰는 조건으로 로봇과 장비 도입을 지원하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개발 초기 단계부터 생산라인과 공정 데이터를 국내 장비 회사에 열어주고, 초기 실증에서 발생하는 실패 비용과 수율 손실을 정부가 나눠 지면 된다. 공공 부문이 먼저 사주는 것도 방법이다. 중국의 지방정부가 훈련 센터를 세워 자국 로봇을 사들이는 것이 정확히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수요와 함께 봐야 할 것이 데이터다. 로봇이 현장에서 일하려면 현장의 데이터로 학습해야 하는데, 그 데이터는 한국 공장에서만 나온다. 조선소와 반도체 팹과 자동차 라인은 다른 나라가 복제할 수 없는 학습 환경이다. 여기서 쌓인 데이터는 모델 가중치와 달리 공짜로 풀리지 않는다.

정부는 반도체와 AI 분야 청년 전문 인력 20만 명을 양성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그 인력을 받아줄 회사가 두 곳뿐이라면 숫자는 채워도 일자리는 생기지 않는다. 사람을 먼저 길러놓고 갈 곳을 찾을 것이 아니라, 갈 곳을 만들어놓고 사람을 길러야 한다.

지금 20대와 30대의 불만이 어디서 터져 나오는지 보면 답이 있다. 성장률은 3%인데 청년 취업자는 44개월째 줄고 있다. 두 개의 점만으로 굴러가는 경제가 만들어낸 결과다. 독자 모델로 국가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보다, 국산 감속기를 사줄 공장을 만드는 일이 훨씬 덜 화려하지만 훨씬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린다.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우리는 반쪽의 몸으로 여기까지 왔다. 이제 그 몸으로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판단이다.

파운데이션 모델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 GPU가 없고, 사람이 없고, 그 모델을 사줄 시장이 없다. 셋 중 하나만 없어도 어려운데 셋 다 없다. 미래에 GPU가 들어온다 한들 그때는 판이 끝나 있다.

할 수 있는 일은 하드웨어다. 반도체는 이미 세계 최고이고, 전기차는 중국을 빼면 해볼 만하며, 휴머노이드는 현대차그룹이라는 실체가 있다. 여기에 전기를 싸게 공급하고, 부품과 소재를 국내에서 조달할 수 있게 만들고, 그 국산 부품을 사줄 수요처를 만들어주면 된다.

그러나 하드웨어만으로는 부족하다. CXMT가 무서운 이유가 기술이 아니라 생태계였다는 것을 다시 짚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좋은 칩 하나, 좋은 로봇 하나가 아니라 그 기술을 받아서 다시 돌려주는 생태계다. 칩을 사줄 완제품이 있고, 그 위에서 돌아갈 소프트웨어가 있고, 그것을 만드는 장비와 부품이 국내에서 나오는 구조다. 기술이 두 회사 안에서 끝나지 않고 생태계 안을 돌 때, 비로소 고용이 생기고 산업이 된다. 지금 한국에 없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그 순환이다.

반쪽의 몸으로 5000년 역사상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선 것은 원래 잘하는 일이 있어서가 아니다. 돈도 없고 지하자원도 없었으니, 그 시기에 열리는 판을 하나 골라 가진 것을 전부 밀어 넣는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의 경공업이 그랬고,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이 그랬고, 그 뒤의 반도체가 그랬다. 매번 우리가 잘하는 것을 고른 것이 아니라, 그때 이길 수 있는 판을 골라 집중했을 뿐이다.

지금 해야 할 일도 다르지 않다. 이번에 열린 판은 하드웨어이고, 정확히는 그 하드웨어를 받아서 다시 돌려주는 생태계다.

만들 수 없는 것에 매달리는 동안 만들 수 있는 것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판만 옮기면 조건은 오히려 좋은 편이다. 경공업을 시작하던 시절 우리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은 세계 최고의 메모리 회사와 자동차 회사가 있고, 감속기와 액추에이터를 만들겠다고 이미 뛰어든 회사들이 있고, 다른 나라가 복제할 수 없는 조선소와 반도체 팹과 생산 라인이 있다. 그 현장에서만 나오는 데이터도 있다. 부족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이것들을 서로 이어주는 연결이다.

연결은 새로 발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줄 곳을 만들고, 실패 비용을 나눠 지고, 대기업의 라인을 열어주기로 결정하면 되는 일이다. 반도체를 처음 시작할 때 우리가 가졌던 것보다 지금 가진 것이 훨씬 많다.

우리는 이런 베팅을 잘해온 나라다. 과거에는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다. 자본도 기술도 사람도 없었고, 판을 골라도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일 힘이 없었다. 그런데도 해냈다. 지금 한국이 가진 힘은 그때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반쪽의 몸으로 여기까지 왔고, 이번에도 우리는 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