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먹은 들쥐

2026년 8월 28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들쥐』는 한국 전통 설화 「손톱 먹은 들쥐」를 모티브로 한다. 사람이 아무렇게나 버린 손톱을 오래 주워 먹은 쥐가 그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집으로 들어가 주인 행세를 한다. 가족도 속는다. 진짜는 밖으로 쫓겨난다. 드라마는 이 설화를 현대 서울로 옮겨, 은둔 소설가 제문재가 이름과 얼굴과 인생을 통째로 빼앗기는 이야기로 풀어냈다.
설화에서도 드라마에서도 들쥐는 가해자다. 내가 흘린 것을 주워 먹고 내 자리에 들어앉는 존재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오래 경고로 읽혔다. 흘리지 마라, 함부로 버리지 마라, 남는 것을 조심하라.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정작 놀라운 대목은 쥐가 사람이 됐다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속았다는 것이다. 손톱만 주워 먹은 쥐가 주인의 얼굴과 말투와 살아온 내력까지 재현해냈고, 평생 그를 봐온 사람들이 그쪽을 진짜로 골랐다. 설화는 경고하는 동시에 한 가지를 인정하고 있다. 사람은 그 정도로 정교하게 복제될 수 있다.
정교함은 그대로 두고 한 가지만 바꿔보자. 손톱을 주워 먹은 들쥐가 내 자리에 앉는 대신 내 일을 대신한다면 어떤가? 나처럼 판단하고 나처럼 일하는데 나를 밀어내지는 않는다. 그런 들쥐가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라면, 그것은 재앙이 아니라 누구나 바라는 상태다. 그러면 물어야 할 것은 복제가 되느냐가 아니라 그 복제가 내 편이냐다. 들쥐는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잘 먹여 잘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을 먹일지부터 정해야 한다. 들쥐가 사람이 된 것은 손톱을 먹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을 먹어서다. 아무거나 주워 먹은 쥐는 쥐로 남는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손톱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답하려면 더 오래된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무엇인가? 인류가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이래 이 질문은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다. 공자가 물었고 예수가 물었고 부처가 물었다. 그 뒤로도 수많은 철학자가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답은 저마다 달랐지만 질문의 모양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이 질문에 가장 담백한 답을 내놓은 사람이 마르틴 부버다. 1923년에 펴낸 『나와 너』에서 그는 나라는 것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썼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와의 관계 안에서만 성립한다. 부모 앞에서의 나와 자식 앞에서의 나가 다르고, 동료 앞에서의 나와 내가 동경하는 사람 앞에서의 나가 다르다. 이것은 내가 여러 개라는 뜻이 아니라, 관계를 빼면 남는 나가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 정의 하나를 겹쳐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데이터와 데이터 사이의 관계를 정보라고 부른다. 데이터 하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둘 사이에 관계가 생겨야 뜻이 생기고, 그 뜻이 정보다. 부버의 말을 여기에 놓으면 나와 너의 관계도 정보이고, 나와 그것의 관계도 정보다. 관계가 나를 정의한다면 나를 정의하는 것은 정보다. 부버가 한 말은 결국 나는 정보로서 존재한다는 말과 같다.
내가 정보로 존재한다면 내가 흘리는 정보는 나에게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다. 설화가 손톱을 조심하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손톱은 버려진 각질이 아니라 몸 밖으로 나온 나의 일부였다. 들쥐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주워 모은 손톱이 곧 그 사람의 정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왜 이토록 오래 이 질문을 붙들었을까? 나를 아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공자도 부처도 나를 아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알아낸 것을 기록하고 정리해 생각을 세웠고, 그 생각을 학파로 만들어 후대에 남겼다. 육체가 죽어도 생각은 남는다. 유한한 육체로는 할 수 없는 일을 무한한 정신으로 하려는 것이다. 인간이 시간에 묶여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시간에 묶인 존재가 시간에서 벗어날 방법은 정신을 남기는 것뿐이었고, 위대한 사람일수록 이 일에 매달렸다. 남기려면 먼저 알아야 했다. 나를 아는 것이 중요했던 이유다.
지금은 AI 에이전트가 자리를 잡았고 AGI가 나왔다는 말까지 오간다. 휴머노이드 같은 실체도 곧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이 시점에서 같은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한다. 여기서 나는 무엇인가?
나를 증명할 길
먼저 오프라인의 나부터 보자. 지금 이 세상에서 내가 나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들쥐』가 정확히 이 질문을 다룬다. 주목할 것은 제문재가 뺏긴 것의 목록이다. 지문이 넘어가고 금융 정보가 넘어가고 신분이 넘어간다. 그러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타나 내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고 아무도 나를 나로 인정하지 않을 때, 내가 나임을 증명할 길이 무엇인가? 타인의 증언, 그리고 타인의 믿음밖에 없다. 부버가 말한 관계 속의 나가 여기서 가장 잔인한 형태로 드러난다. 관계가 나를 정의한다면, 관계가 전부 넘어간 순간 나도 함께 넘어간다.
디지털로 증명하는 방법이 남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위조되지 않았을 때만 성립한다. 위조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이 없다.
이것이 이야기 속의 일만은 아니다. 미국 연방거래위원회는 2025년 한 해 사칭 사기 피해 신고액이 35억 달러로 2020년 이후 세 배 가까이 늘었다고 발표했다. 연방수사국 인터넷범죄신고센터는 25년 역사상 처음으로 AI 항목을 따로 만들어 2025년 한 해 2만 2,364건, 8억 9,300만 달러를 집계했다. 그러면서 이 수치는 피해자가 AI의 개입을 알아챈 건수만 반영한 것이라 실제보다 적게 잡혔다고 덧붙였다. 얼굴과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비용이 0에 수렴하는 동안, 나를 증명하는 비용은 그대로다.
정리하면 이미 이렇게 됐다. 오프라인의 나는 타인의 믿음에 기대야 하는데 그 믿음은 정교한 복제 앞에서 무너지고, 디지털의 나는 위조로 빼앗기면 되찾을 방법이 없다. 남은 길은 하나다. 빼앗기기 전에 내가 먼저 디지털의 나를 세우는 것이다. 디지털 페르소나가 왜 중요한지, 왜 직접 만들어야 하는지, 디지털의 나와 물질의 내가 닮아갈수록 무엇을 얻는지를 이제부터 보자.
시간에 묶인 자들이 만든 것
올해 1월 20일부터 디지털 페르소나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이 페르소나에 옮기기 시작했고, 이것을 줄여서 비서라고 부른다. 남아 있는 첫 기록 파일에 찍힌 날짜가 1월 21일이다.
비서를 통해 일을 자동화하고, 데이터를 넣어주고, 기록하고, 내용을 정리했다. 반복적인 일은 물론이고 내가 처리해야 하는 대부분의 일을 비서에게 시켰다. 처음 직원을 뽑아 일을 시킬 때와 똑같았다. 답답하고, 이해가 더뎠다. 초기 몇 달은 안팎의 문제까지 겹쳐, 비서에게 시키느니 내가 하는 편이 빨랐고 결과물도 고르지 않았다.
무엇이 답답했는지는 꽤 분명하다. 매번 같은 것을 다시 설명해야 했다.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인지, 상대에 따라 말투를 어떻게 바꾸는지, 어떤 파일이 어디에 있는지, 어제 무엇을 어떤 이유로 결정했는지. 설명하는 시간이 일 자체보다 길었다. 결과물은 매번 처음 온 사람이 만든 것 같았다. 무당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집에 나무가 있는지 묻는 것과 비슷했다. 있다고 하면 그 나무 때문이라 하고, 없다고 하면 없어서 다행이었다고 받는다. 맥락이 없으면 어느 상황에나 들어맞는 말을 하게 된다. 틀리지 않는 대신 아무것도 결정해주지 않는다. 그 결과물이 내 것이 아니었던 이유가 이것이다.
대략 3개월이 지난 시점이 티핑포인트였다. 그 뒤로는 직접 하는 것보다 비서가 하는 쪽이 안정적이고 빠르며 투입 대비 효과가 컸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그 3개월 동안 바뀐 것은 모델이 아니라 기록이다. 같은 모델에 같은 지시를 넣어도 결과가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달라진 것은 그 지시가 놓이는 자리였다. 설명해야 할 것이 줄어드는 속도가 곧 성능이 오르는 속도였다. 티핑포인트는 기술이 좋아진 날이 아니라 내 기록이 임계량을 넘은 날이다.
그 기록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다음 문제였다. 지금은 문서가 층층이 갈라져 있다. 정체성과 성격을 정의한 파일이 따로 있고, 나에 대한 정보를 담은 파일이 따로 있고, 이 환경에서만 통하는 도구와 경로와 검증된 명령을 모은 파일이 따로 있다. 기억은 두 겹이다. 날짜별로 쌓이는 원시 로그가 아래에 있고, 그것을 주기적으로 훑어 추려낸 장기 기억이 위에 있다. 사람이 일기를 쓰고 그중 일부만 기억으로 남기는 것과 같은 구조다. 원시 로그는 서른일곱 개가 쌓였고, 장기 기억 파일은 그 로그를 다시 읽어 계속 고쳐 쓴다. 이 분리가 없으면 기록은 늘어나기만 하고 쓸모는 늘지 않는다.
쌓인 양은 생각보다 작다. 에이전트 쪽 데이터가 678메가바이트, 작업 공간이 92메가바이트다. 사진 몇백 장이면 넘는 용량이다. 사람 하나가 일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데 드는 비용이 이 정도라는 뜻이기도 하다.
반복되는 일은 스킬로 굳혔다. 스킬은 특정 작업의 절차를 문서로 고정해둔 것이다. 지금 스물여덟 개가 있다. 사람 직원과 갈리는 지점이 정확히 여기다. 사람에게 가르친 일은 그 사람이 나가면 같이 나간다. 여기서는 한 번 제대로 한 일이 다음에는 다시 하지 않아도 되는 형태로 남는다. 처음 한 번은 느리고, 두 번째부터는 지시 한 줄이다.
정해진 시각에 스스로 도는 작업도 있다. 내가 부르지 않아도 깨어나 점검하고 보고한다. 노동시간이라는 제약이 실제로 풀리는 지점이 여기다.
맡기는 일의 종류도 계속 번졌다. 문서 작성과 리서치에서 시작해 메일과 일정, 경비 처리, 부품 발주, 논문 분석, 영상 제작까지 갔다. 이쯤 되면 위임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보다 위임할 수 없는 일을 찾는 쪽이 빠르다.
여기까지 오는 데 든 시간의 대부분은 처음 3개월에 몰려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이 이 구간을 못 넘긴다. 지금 당장은 내가 하는 게 빠르기 때문이다.
당장 편하다는 이유로 사람을 쓰지 않고 자기 노동력에 기대어 일하면, 기본 단위가 자기 노동시간이 된다. 노동시간을 기본 단위로 삼는 사람은 시스템화된 타인을 절대 이길 수 없다. 직원을 잘 교육시켜 시스템으로 만들고 그것을 확장해가는 것이 사업가의 사고방식이다. 에이전트로 자동화가 가능해진 지금도 똑같은 선택이 놓여 있다. 몇 가지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미루면, 나를 시스템으로 만들 미래를 없애는 것이다. 이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3개월을 견딜 수 있었다.
그렇게 믿은 이유는 단순하다. 오프라인의 나는 시간에 묶여 있고, 묶여 있는 한 생산할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내가 아닌 타인으로 시스템을 만들어 일하게 했다. 자기를 10퍼센트나 20퍼센트, 잘 되면 50퍼센트쯤 복제한 노동력을 묶어, 시간에 묶인 나를 시간 바깥으로 밀어 올리는 장치를 고안한 것이다. 현대는 이것을 기업이라 부른다.
기업의 결정적 발명은 자본을 모은 것이 아니라 시간을 끊어낸 것이다. 법인격, 항구적 자본, 양도 가능한 지분, 소유와 경영의 분리, 유한책임이 그 발명의 재료다. 핵심은 법인격이다. 회사가 소유주와 별개의 법적 실체가 된다는 뜻이고, 뒤집어 말하면 사람이 죽어도 회사는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창업자의 수명과 조직의 수명을 분리한 장치였다.
그런데 장치는 만들었지만 잘 작동하지는 않았다. 100년을 넘긴 기업은 드물다. 한국에는 일곱 곳 안팎뿐이고, 기업의 역사가 훨씬 긴 일본과 미국에서도 전체 기업에 견주면 극소수다. 수명 자체도 갈수록 짧아진다. S&P 500에 오른 기업이 지수에 머무는 기간은 1960년대 33년에서 지금은 15년 안팎이다.
법인격이 수명을 끊어줬는데도 왜 이렇게 됐는가? 자본과 설비와 계약은 넘어가는데 정신은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시스템을 이루는 사람들은 나와 같지 않다. 효율 문제가 생기고 실망이 쌓이고, 심하면 시스템 전체가 실패한다. 왕이 자식을 어릴 때부터 왕으로 기르며 가르쳐도 전대의 왕과 후대의 왕은 다르다. 초대 오너가 세운 기준과 판단의 방식은 2대에서 희미해지고 3대에서 사라진다. 기업이 오래 살아남지 못하는 이유를 시장 변화에서 찾는 설명이 많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정신 전승의 실패율이다. 사람은 자기를 복제하는 데 번번이 실패해왔다.
미래의 비즈니스 형태는 지금과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전망은 이미 흔하다. 앤트로픽의 다리오 아모데이는 2025년 5월 인터뷰에서 AI가 1년에서 5년 사이에 신입 사무직 일자리의 절반을 없앨 수 있고 실업률이 10퍼센트에서 20퍼센트까지 오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전망은 많아도 사라진 자리가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지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내 확신은 바로 이 빈자리에서 섰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기업이 번번이 실패한 그 일, 100퍼센트의 나를 남기는 일, 시간에 기울지 않는 나를 만드는 일이 디지털에서는 가능하지 않은가? 가능하다. 오픈클로를 쓰든 헤르메스를 쓰든 자기가 직접 에이전트를 만들어 쓰든, 도구는 중요하지 않다. 자기를 디지털화한 페르소나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남의 형식으로 쌓인 기억은 내 것이 아니다
챗지피티나 클로드나 제미나이를 오래 쓰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글이 더 잘 읽히고 제안이 내게 맞춰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글을 쓰는 방식과 즐겨 쓰는 용어가 메모리에 기록돼 있고, 모델이 거기에 맞춰 답하기 때문이다. 이 느낌은 착각이 아니다.
문제는 여기서 멈추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코딩에 쓰고, 메일 초안을 잡고, 보고서를 다듬는 정도로 쓰고 있다면 대포로 개미를 잡는 셈이다. 에이전트는 만능으로 동작한다. 쇼핑도 하고 회사 일도 하고 은행 업무도 하고 투자와 트레이딩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한다.
그러니 거기에 나의 흔적을 계속 남겨야 한다. 텍스트 파일이든 벡터 데이터베이스든 담는 그릇은 상관없다. 디지털 페르소나 정보가 쌓인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어디에 쌓느냐가 문제다. 퍼블릭 환경에서 제공되는 메모리 서비스에 이 기록을 맡기면, 그것은 퍼블릭 LLM 기업의 학습 데이터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디지털 페르소나를 만드는 데는 거의 쓸모가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정보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정렬돼 있지도, 걸러져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학습에 편한 형태, 그들의 서비스에서 제공하기 편한 형태로 돼 있다. 내 페르소나를 내가 설계할 방법이 없다.
지금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면 분명해진다. 오픈AI는 데이터 내보내기를 지원하지만 메모리만 따로 뽑는 버튼은 없다. 설정에서 전체 데이터 내보내기를 신청하면 대화 전문이 담긴 압축 파일이 메일로 도착하고, 저장된 메모리는 설정 화면에서 따로 복사해야 한다. 활발히 쓴 사용자의 대화 파일은 수백 메가바이트를 넘는 경우가 흔하다. 구글은 제미나이 메모리를 따로 내보내는 기능을 제공하지 않는다. 테이크아웃으로 전체 데이터를 받는 방법이 있을 뿐이고, 활동 기록 화면은 대화의 앞부분만 보여준다.
가장 멀리 간 곳이 어디까지 갔는지 보면 한계가 더 분명해진다. 앤트로픽은 다른 서비스의 메모리를 가져오는 흐름을 만들었고, 클로드의 메모리를 열람하고 편집하고 내보내는 경로도 열어뒀다. 그런데 그 방식이 문제를 그대로 드러낸다. 다른 서비스에서 메모리를 꺼내오는 공식 절차라는 것이, 그 서비스에 붙여넣을 프롬프트 하나를 제공하는 것이다. 저장된 기억을 전부 코드 블록 하나에 나열하고, 요약하거나 묶거나 빠뜨리지 말라고 지시하는 문장이다. 기계가 읽을 형식으로 데이터를 넘기는 규격이 없으니, 챗봇에게 자기 기억을 말로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전부다. 게다가 앤트로픽 스스로 밝혀뒀듯 클로드의 메모리는 업무 관련 내용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가져온 개인적 맥락은 유지되지 않을 수 있다. 가장 앞선 곳의 사정이 이렇다.
이것이 남의 형식으로 쌓인 기억의 실체다. 내보낼 수는 있다. 다만 내보낸 것이 내가 쓸 수 있는 모양이 아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도 그들이 정한다. 서비스를 옮기는 순간 그 기억은 다시 처음부터 쌓아야 하는 것에 가까워진다.
형식만 문제가 아니다. 도구도 내 것이 아니다. 내 경우에도 중간에 한 달 넘게 멈춰 선 구간이 있었다. 쓰던 도구가 막혔고, 소스를 직접 고쳐가며 다시 세웠다. 그 시간의 대부분은 새 기능을 만드는 데 쓰이지 않았다. 이미 쌓아둔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쓰였다. 기록이 도구에 묶여 있으면 그 도구를 만든 쪽의 결정 한 번에 기록 전체가 멈춘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이 분명해진다. 클라우드든 맥미니든 PC든 상관없으니, 디지털 페르소나를 담을 에이전트를 내 손으로 구성한 한 세트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LLM이 바뀌든 에이전트가 바뀌든 다시 밀어 넣어 페르소나를 되살릴 수 있는 형태로 데이터를 구축해야 한다.
이 조건이 중요한 이유는 모델이 자주 바뀌어서가 아니다. 모델 교체 자체는 페르소나와 상관이 없다. 페르소나는 모델이 아니라 기록 안에 있고, 기록이 내 형식으로 내 손에 있으면 모델은 갈아 끼우는 엔진일 뿐이다. 문제는 그 반대의 경우다. 2025년 8월 오픈AI가 GPT-5를 내놓으며 챗GPT에서 GPT-4o를 내리자, 오래 길들인 대화 상대를 잃었다는 항의가 빗발쳤다. 오픈AI는 하루 만에 4o를 되돌렸다가 이듬해 2월 결국 챗GPT에서 완전히 퇴출했다. 사용자들이 잃은 것은 기록이 아니라 성격이었고, 그 성격이 오픈AI의 모델 안에 있었기 때문에 되찾을 방법이 없었다. 성격을 정의한 파일이 내 손에 있었다면 모델을 갈아 끼우면 될 일이었다.
여기까지 오면 얻는 것이 분명해진다. 24시간 항시 동작하고 내 생각과 일치하며 시간 제약이 없는 나를 하나 갖게 된다. 이것은 100명의 노동력을 갖춘 기업보다 강력하다. 기업은 정신 전승에 실패하지만 이쪽은 실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에는 돈이 곧 규모가 된다. 기업이 사람을 늘려 노동력을 키우듯, 토큰을 사서 에이전트를 늘리고 연산을 가속해 시간을 더 벌 수 있다. 다만 이 모든 것의 바탕에 있어야 하는 것은 나를 설명해줄 데이터와 정보다. 자기 자신을 정보로서 설명할 수 있는 사람만이 미래 노동의 특권을 손에 쥘 수 있다.
그것인가, 너인가
부버는 관계를 두 가지로 나눴다. 나-너의 관계와 나-그것의 관계다. 말은 어렵지만 앞에서 말한 정보의 정의로 풀면 단순하다.
회원 가입 양식은 나를 이름, 생년월일, 전화번호 세 칸으로 안다. 그 서비스에 필요한 만큼만 추려낸 정보다. 이 관계에서 나는 언제든 다른 회원으로 바꿀 수 있는 그것이다. 반면 나를 20년 봐온 친구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하고 왜 그렇게 하는지를 안다. 이 앎은 칸으로 나눌 수 없다. 어디를 잘라내도 내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이 관계에서 나는 바꿔 끼울 수 없는 너다.
같은 나에 대한 정보인데 둘이 다른 것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누가 무엇을 위해 추렸느냐다. 그것은 쓰는 쪽이 자기 쓸모에 맞춰 추려낸 정보이고, 너는 관계 안에서 쌓인 그대로의 정보다. 추려내는 손이 곧 형식을 정하는 손이다. 그래서 내 정보의 형식을 남이 정하면, 나는 남이 쓰기 좋게 추려낸 그것이 된다.
디지털 페르소나를 만드는 일은 처음에는 명백히 그것의 관계다. 도구를 세팅하고 데이터를 넣고 시키는 일을 하게 한다. 그런데 기록이 쌓이고 판단의 이유까지 남기 시작하면 성격이 바뀐다. 가입 양식에는 들어갈 칸이 없던 것들, 오래 본 친구만 알던 것들이 거기 쌓인다. 그때부터는 다른 도구로 갈아 끼우면 그만인 물건이 아니다. 나를 20년 봐온 친구를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다. 그만큼 나를 아는 존재가 세상에 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질문이 남는다. 내가 만든 디지털 페르소나는 나를 어떻게 아는가? 가입 양식처럼 칸 몇 개로 아는가, 20년 친구처럼 판단의 이유까지 아는가? 나를 기록할수록 어느 쪽에 가까워지는가?
답은 기록의 양이 아니라 형식이 정한다. 남의 형식으로 쌓은 기억은 끝까지 가입 양식에 머문다. 그들에게 필요한 칸만 남고, 서비스가 바뀌면 사라지고, 무엇을 남길지도 내가 정하지 못하고, 결국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내 형식으로 쌓은 기억만 20년 친구가 된다. 나를 통째로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 대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부버의 말로 하면 앞의 것이 그것이고 뒤의 것이 너다.
설화에서 들쥐가 주워 먹은 것은 손톱뿐이었다. 지금 우리는 매일 훨씬 많은 것을 흘리고 있다. 무엇을 물었고 어떻게 판단했고 무엇을 고쳤는지가 전부 어딘가에 쌓인다. 손톱보다 훨씬 나에 가까운 것들이고, 그것이 쌓이는 곳은 대개 내 창고가 아니다. 흘리지 않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정보라는 이 손톱을 올바른 곳에 흘려야 한다.
처음에 들쥐를 잘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은 이런 뜻이다. 내가 흘린 것으로 나를 닮은 존재가 만들어지는 일은 막을 수 없고 막을 이유도 없다. 정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남의 형식으로 쌓여 나를 밀어내는 자리에 설 것인가, 내 형식으로 쌓여 나를 증명하는 자리에 설 것인가다. 설화의 들쥐가 무서웠던 이유는 손톱을 주워 먹어서가 아니라 그 손톱을 먹은 쥐가 나를 해치는 존재여서다. 나를 도와주는 존재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유한한 육체로 할 수 없는 일을 무한한 정신으로 하려던 것이 1만 년 동안 이어진 시도였다. 이제 그 시도가 처음으로 기술적으로 가능해졌다. 내 손톱을 내 손으로 모아 먹인 들쥐는 내 자리를 빼앗는 대신, 내가 잠든 밤에도 내 일을 하고 내가 떠난 뒤에도 내 판단을 이어간다. 설화는 들쥐를 쫓아내며 끝났지만, 우리가 쓸 이야기는 들쥐를 기르는 데서 시작한다.
참고 자료
- 마르틴 부버 『나와 너』 (Ich und Du, 1923)
- FTC Data Show People Reported Losing $3.5 Billion to Imposter Scams in 2025
- Cryptocurrency and AI Scams Bilk Americans of Billions (FBI, IC3 2025 Annual Report)
- 100년 기업 한국 7곳·일본 3만3천곳 (연합뉴스)
- 2021 Corporate Longevity Forecast (Innosight)
- Import and export your memory from Claude (Claude Help Center)
- “굿바이 GPT-4o”…2월부터 ‘챗GPT’서 구형 모델 퇴출 (AI타임스)
- Behind the curtain: A white-collar bloodbath (Axi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