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거대한 변화의 문턱에 서 있다. AI 에이전트가 일상화되면서 기업의 운영 방식과 경제 구조 전체가 뒤바뀌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오랫동안 구닥다리라고 치부해왔던 한국 재벌의 수직계열화 구조가 이 새로운 시대의 성공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이 앞다투어 한국 재벌을 벤치마킹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간 기업의 종말

SaaS로 대표되는 중간 회사들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지금까지 이들은 공통의 니즈를 파악하여 평균적인 솔루션을 만들고, 이를 개개인에게 맞추는 역할을 해왔다. Salesforce, SAP, Oracle과 같은 거대 SaaS 기업들은 표준화된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제공하고, 각 기업은 이를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커스터마이징해서 사용해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컨설팅 회사, SI 업체, 파트너사들이 중간 다리 역할을 하며 거대한 생태계를 형성했다.

하지만 AI 에이전트가 대중화되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개개인이 필요한 것을 AI가 즉시 커스터마이징해주는 시대에, 굳이 평균에 맞춰진 제품을 사용할 이유가 없어진다. 공급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대량 생산에서 개인 맞춤형 생산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업이 CRM 시스템을 도입한다고 생각해보자. 기존에는 Salesforce 같은 SaaS를 구매하고, 이를 기업의 비즈니스 프로세스에 맞게 커스터마이징하기 위해 컨설팅 회사를 고용했다. 몇 개월에서 몇 년에 걸친 프로젝트를 통해 겨우 ‘평균적으로 잘 작동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AI 에이전트 시대에는? 기업의 니즈를 AI가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즉시 최적화된 시스템을 구축한다. 중간 단계는 모두 사라진다.

이런 변화 속에서 그동안 SaaS 회사와 최종 사용자 사이를 연결해온 파트너사나 SI 업체들의 존재 이유도 사라지고 있다. 이들의 핵심 역할은 표준화된 제품을 고객의 니즈에 맞게 커스터마이징하는 것이었다. 한국만 해도 삼성SDS, LG CNS, SK C&C 같은 대형 SI 업체들이 수십 년간 이런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AI가 이 역할을 대체하면서, 중간 단계는 불필요한 비용과 시간만 추가하는 걸림돌이 되어가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런 변화는 B2B 소프트웨어 시장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마케팅 자동화, HR 관리, 회계 소프트웨어 등 각 분야별로 특화된 수많은 SaaS 기업들이 있었다. 하지만 AI가 이 모든 기능을 통합적으로 제공할 수 있게 되면서, 개별 솔루션의 필요성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결국 살아남는 것은 전체 밸류체인을 장악한 수직계열화된 기업들뿐이다.

한국 재벌, 그 뿌리와 진화

한국의 재벌 구조를 이해하려면 그 역사적 뿌리를 살펴봐야 한다. 재벌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본의 자이바츠(재벌)에서 온 것처럼, 한국의 재벌은 일본 식민지 시대와 전후 경제 개발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일본의 재벌은 메이지 유신 이후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탄생했다.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같은 거대 재벌들은 군국주의 체제에서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였다. 하나의 명령으로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올인원 기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광산에서 원료를 캐고, 이를 가공하여 제품을 만들고, 은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상사를 통해 판매하는 완벽한 수직계열화 구조였다.

일본의 패망 후 1945년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의 재벌을 해체했다. 재벌이 일본 군국주의의 경제적 기반이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구조는 한국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경제 개발을 위해 일본의 재벌 모델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가난한 농업 국가에서 산업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자원을 집중하고 신속한 의사결정이 가능한 구조가 필요했다.

삼성의 창업자 이병철은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라는 작은 무역회사로 시작했다. 초기에는 국수와 건어물을 중국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한국전쟁 이후 설탕, 모직 공장을 세우고, 1960년대에는 전자산업에 진출했다. 1977년 삼성은 미국, 유럽, 일본의 컬러 TV를 분해해서 역설계하는 방식으로 기술을 습득했고, 3년 만에 자체 생산에 성공했다.

현대는 정주영이 1947년 현대자동차공업사로 시작했다. 건설업으로 사업을 확장한 현대는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을 타고 급성장했다. 이후 조선, 자동차, 전자, 중공업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특히 1970년대 울산에 조선소를 건설할 때는 조선 경험이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주영의 추진력으로 세계적인 조선 강국의 기반을 만들었다.

LG는 1947년 구인회가 창업한 락희화학에서 시작됐다. 초기 제품은 치약, 페이스크림, 비누였다. 1950년대 플라스틱 산업에 진출하고, 1958년 금성사를 설립해 전자산업에 뛰어들었다. 한국 최초의 냉장고, 세탁기, TV, 에어컨을 생산하며 ‘금성’이라는 브랜드로 국민 기업이 되었다.

SK는 1962년 최종건이 인수한 선경직물에서 출발했다. 섬유산업에서 시작해 1980년 유공(현 SK에너지)을 인수하며 정유·화학 사업에 진출했다. 이후 통신(SK텔레콤), 반도체(SK하이닉스)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이들 재벌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성장했다. 수출 실적에 따른 저리 대출, 세제 혜택, 독점적 사업권 부여 등이 이루어졌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기에 재벌들은 연평균 20%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2021년 기준으로 상위 10대 재벌이 한국 GDP의 60%를 차지했다. 삼성, SK, 현대, LG 등 상위 4대 재벌만으로도 GDP의 40.8%를 차지했고, 상위 30대 재벌은 GDP의 76.9%를 차지했다. 특히 삼성은 2024년 기준으로 한국 GDP의 약 23%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이런 집중도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수준이다.

끊임없는 비판과 자기 의심

80년대 민주화 이후 한국의 재벌 구조는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수직계열화와 순환출자 구조는 미국식 자본주의에 맞지 않는 후진적 시스템으로 여겨졌다. 경제력 집중, 불공정 거래, 중소기업 성장 저해 등 재벌의 폐해는 30년 넘게 한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였다.

2012년 삼성과 LG전자는 가전제품 가격 담합으로 벌금을 부과받았다. 이런 사례는 재벌의 시장 지배력 남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또한 재벌 총수 일가의 경영권 세습, 일감 몰아주기, 부당 내부거래 등의 문제도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다.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는 깊은 자기 의심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늘 우리의 구조가 뒤떨어지고 문제가 있어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이는 한국의 독특한 세대 경험에서 비롯된다. 후진국에서 태어난 조부모 세대, 중진국에서 자란 부모 세대, 선진국에서 나고 자란 자녀 세대가 공존하는 나라는 한국과 대만 정도뿐이다. 200년의 발전을 40년에 압축한 나라에서 자기 확신을 갖기란 쉽지 않다.

1997년 외환위기는 재벌 구조에 대한 비판을 극대화시켰다. 과도한 차입 경영, 문어발식 확장, 부실한 지배구조가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대우, 한보, 진로 등 여러 재벌이 무너졌고, 살아남은 재벌들도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거쳤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과정을 통해 한국 재벌들은 더욱 강해졌다. 핵심 역량에 집중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사업 위주로 재편했다.

미국 빅테크의 한국 재벌 따라하기

그런데 최근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행보를 보면 놀라울 정도로 한국 재벌과 닮아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수직계열화 전략은 한국 재벌이 수십 년간 구축해온 구조와 본질적으로 같다.

애플의 수직계열화는 가장 극단적이다. 애플은 35년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통합 접근법을 고수해왔다. iPhone과 iPad는 애플이 직접 설계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며, 자체 프로세서까지 설계한다. 2020년 발표된 M1 칩은 인텔 의존도를 완전히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 애플은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판매하고 자체 리테일 공간까지 보유하고 있어 다른 기업들이 경쟁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 애플은 부품 공급망까지 장악하고 있다. 디스플레이, 메모리, 카메라 모듈 등 핵심 부품의 생산 능력을 선점하여 경쟁사들이 부품을 구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는 한국 재벌들이 계열사를 통해 부품을 자체 조달하는 구조와 매우 유사하다.

아마존의 수직계열화는 더욱 광범위하다. 전자상거래에서 시작한 아마존은 클라우드 서비스, 물류, 식료품 유통(홀푸드를 137억 달러에 인수), 의료(원메디컬)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특히 물류 분야에서는 자체 배송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FedEx, UPS와 직접 경쟁하고 있다.

아마존의 AWS는 원래 자사의 전자상거래 인프라를 위해 개발됐다가 외부에 서비스로 제공된 것이다. 이는 한국 재벌들이 내부 역량을 외부 사업화하는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예를 들어, 삼성SDS는 원래 삼성 그룹의 IT 시스템을 관리하다가 외부 고객에게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IT 서비스 기업이 됐다.

구글의 수직계열화 시도는 더욱 흥미롭다. 구글은 모토로라 모빌리티를 인수해 스마트폰과 셋톱박스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비록 모토로라는 후에 레노버에 매각됐지만, 구글은 Pixel 스마트폰을 통해 하드웨어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구글의 Tensor 칩 개발은 애플처럼 칩부터 OS, 클라우드까지 전체 스택을 통제하려는 시도다.

구글의 다각화는 재벌을 연상시킨다. 검색엔진에서 시작해 광고, 동영상(YouTube), 클라우드, 자율주행차(Waymo), 헬스케어(Verily), 도시 개발(Sidewalk Labs) 등 전혀 다른 분야로 확장했다. 이는 한국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테슬라는 수직계열화의 극단을 보여준다. 테슬라는 단순한 자동차 회사가 아니라 에너지, 자율주행, 로봇공학 분야까지 아우르는 기술 기업으로 분류된다. 테슬라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배터리, 충전 인프라,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심지어 제조 공장의 생산 설비까지 직접 만든다. 외주를 극도로 꺼리는 테슬라의 철학은 모든 것을 내부에서 해결하려는 한국 재벌의 사고방식과 일치한다.

일론 머스크의 기업들을 보면 더욱 재벌스럽다. SpaceX(우주), Tesla(자동차/에너지), Neuralink(뇌-컴퓨터 인터페이스), The Boring Company(터널), X(구 Twitter, SNS) 등 전혀 다른 산업에 걸쳐있다. 이들 기업 간의 시너지 - 예를 들어 SpaceX의 배터리 기술이 Tesla에 활용되는 것 - 는 재벌의 계열사 간 협력과 같다.

왜 지금 수직계열화인가

미국은 1930년대 대공황의 교훈으로 독과점을 극도로 경계해왔다. Standard Oil, AT&T 등 거대 기업들이 분할됐고, 반독점법이 엄격하게 적용됐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런 수직계열화를 방치하고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AI와 IT가 고도화된 시대에는 수직계열화가 혁신과 효율성의 핵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영학자 크리스텐슨은 AGI에 가까운 무언가를 달성하려면 모든 효율성과 최적화를 극대화해야 하며, 이는 통합된 접근 방식에 유리하다고 분석했다.

분업화된 구조에서는 각 단계 간의 조율과 통합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든다. A 회사가 만든 부품을 B 회사가 조립하고, C 회사가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D 회사가 판매한다면? 각 단계마다 마진이 붙고, 의사소통 비용이 발생하고, 품질 관리가 어려워진다. 반면 수직계열화된 기업은 하나의 비전 아래 모든 요소를 최적화할 수 있다.

특히 AI 시대에는 데이터의 통합이 핵심이다. 애플의 수직 통합 전략은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클라우드 서비스가 하나의 통합 생태계를 만들어 각 요소가 서로를 강화한다. 사용자의 데이터가 디바이스에서 클라우드까지 원활하게 흐르고, 이를 통해 더 나은 AI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AI가 바꾸는 수직계열화의 의미

AI 시대에 수직계열화의 장점은 더욱 극대화된다. 과거에는 한 기업이 모든 것을 하려면 각 분야의 전문성을 확보하기 어려웠고, 다양성도 떨어졌다. 대기업병, 관료주의, 혁신 부족 등이 수직계열화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됐다.

하지만 AI는 이 문제를 해결한다. 각 분야에 특화된 AI를 도입하면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다. 법무는 법무 AI가, 회계는 회계 AI가, 마케팅은 마케팅 AI가 담당한다. AI의 생산성 향상으로 한 기업이 다양한 사업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된다. 결국 AI에게 외주를 주는 셈이니, 굳이 다른 회사와 복잡한 계약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어진다.

더 중요한 것은 AI 자체가 수직계열화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AI 모델을 훈련시키려면 방대한 데이터가 필요하다. 수직계열화된 기업은 밸류체인 전체에서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다. 제조 데이터, 유통 데이터, 고객 데이터를 모두 보유한 기업과 일부만 가진 기업의 AI 경쟁력은 하늘과 땅 차이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가 단순히 자동차만 만든다면 운전자의 주행 데이터만 수집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가 부품 제조(현대모비스), 철강(현대제철), 건설(현대건설), 금융(현대캐피탈) 등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면? 고객의 자동차 구매부터 운전, 정비, 폐차까지 전 생애주기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 이는 훨씬 정교한 AI 서비스를 가능하게 한다.

E2E 시대의 도래

에이전트가 추구하는 방향은 명확하다. E2E, 즉 처음부터 끝까지 중간 단계 없이 직접 연결하는 것이다. 사용자가 원하는 것을 AI가 파악하고, 즉시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중간 유통업체나 커스터마이징 업체는 설 자리가 없다.

음악 산업의 변화를 보자. 과거에는 작곡가 → 음반사 → 유통사 → 음반 매장 → 소비자로 이어지는 긴 체인이 있었다. 지금은? 아티스트가 직접 스포티파이나 유튜브에 음악을 올리고 팬들과 직접 소통한다. AI 시대에는 이런 직접 연결이 모든 산업으로 확대될 것이다.

기업 구조도 마찬가지다. 원재료부터 최종 제품까지, 개발부터 판매까지 모든 과정을 하나의 기업이 통합 관리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중간 단계가 많을수록 비효율과 정보 손실이 발생한다. AI는 이런 복잡한 프로세스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AI 에이전트가 주도하는 E2E(End-to-End) 시대에는 기업의 운영 방식이 더욱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과거에는 각 단계별로 전문 기업이 존재하고, 이들 사이의 협업과 조율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AI가 모든 밸류체인에 걸쳐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수집·분석하고, 의사결정까지 자동화하는 환경에서는 전체 프로세스가 하나의 유기적 시스템처럼 움직이게 된다.

이런 변화는 기업의 경쟁력 기준 자체를 바꾼다. 단순히 개별 제품이나 서비스의 품질이 아니라, 전체 밸류체인을 얼마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통합·최적화할 수 있는지가 핵심 역량이 된다. 데이터, 인프라, 인재, 기술 등 모든 자원을 내부에서 순환시키며, 외부 의존도를 최소화하는 구조가 유리하다. 이는 곧, 한국 재벌식 수직계열화가 AI 시대에 최적화된 모델임을 시사한다.

또한, E2E 구조에서는 고객 경험의 혁신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구매한 고객이 차량 관리, 금융, 보험, 정비, 중고차 거래까지 한 플랫폼에서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발생하는 데이터가 AI에 의해 분석되고, 고객 맞춤형 서비스로 즉시 환원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고객 생애주기 전체를 아우르는 장기적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이제 기업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과거처럼 분업화된 생태계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밸류체인 전체를 통합해 E2E 경쟁력을 확보할 것인가. AI 시대에는 후자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결국, 한국 재벌의 수직계열화 DNA가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잡는 날이 머지않았다.

한국 재벌의 미래 가능성

이런 변화는 단순히 기업 구조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경제와 사회 전반의 하부구조가 바뀌면 상부구조인 문화, 교육, 생활양식도 따라서 변할 수밖에 없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우리의 일상이 완전히 바뀌었듯이, AI와 수직계열화가 가져올 변화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한국 기업들은 이미 수직계열화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삼성은 반도체부터 스마트폰, 가전제품, 디스플레이, 조선, 건설, 금융, 의료까지 전 산업을 아우른다. 이런 다각화된 구조는 AI 시대에 엄청난 데이터 우위를 제공한다. 각 사업부에서 수집된 데이터를 통합하면 고객의 전체 라이프스타일을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다.

현대자동차그룹도 마찬가지다. 자동차 제조뿐만 아니라 철강, 건설, 금융, 로보틱스까지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특히 보스턴 다이내믹스 인수를 통해 로봇 기술을 확보한 것은 미래 모빌리티 시장에서 큰 강점이 될 것이다. 자율주행차, 로봇, AI가 융합된 새로운 모빌리티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춘 것이다.

LG는 전자제품에서 화학, 에너지, 통신까지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배터리 사업(LG에너지솔루션)은 전기차 시대의 핵심이다. LG를 비롯한 한국 재벌들은 미국 전기차 업체들과 배터리 및 소재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글로벌 전기차 생태계의 핵심 파트너가 되고 있다.

SK는 통신과 반도체를 중심으로 에너지, 화학, 바이오까지 미래 산업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AI 시대의 핵심인 고대역폭 메모리(HBM)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AI 모델이 대형화되면서 메모리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재벌 구조의 진화 방향

물론 재벌 구조의 문제점들 - 경제력 집중, 지배구조의 불투명성, 중소기업과의 상생 부족 등 - 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재벌 총수는 그룹 전체 지분의 0.5%만 보유하고도 전체를 지배하는 순환출자 구조는 소액주주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수직계열화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운영 방식의 문제다. AI 시대에 맞는 투명하고 효율적인 수직계열화 모델을 만들어간다면,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더욱 강력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복잡한 순환출자를 단순화하고, 이사회의 독립성을 강화해야 한다. 이미 일부 재벌들은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며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있다.

둘째, 중소기업과의 상생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수직계열화가 모든 것을 내부에서 해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핵심 역량은 내부에서, 나머지는 파트너십을 통해 해결하는 유연한 구조가 필요하다. AI 시대에는 작고 민첩한 스타트업과의 협력이 더욱 중요해진다.

셋째, 글로벌 표준에 맞는 ESG 경영을 강화해야 한다. 환경, 사회, 지배구조 측면에서 글로벌 투자자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2025년 1월 기준으로 삼성전자는 외국인 지분율이 73%, 현대차는 50%, SK하이닉스는 55.8%에 달한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으려면 투명하고 지속가능한 경영이 필수다.

넷째, AI와 디지털 전환에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 수직계열화의 장점을 AI 시대에 극대화하려면 전 계열사가 디지털로 연결되어야 한다. 데이터의 통합과 AI의 활용이 미래 경쟁력의 핵심이다.

자신감을 가질 때

우리가 살아갈 AI 시대는 정말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한 변화의 시대가 될 것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기업들은 더욱더 수직계열화되는 방향으로 갈 것이고, 이것이 AI 시대의 생존 방식임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은 이미 그 준비가 되어 있다. 60년간 구축해온 재벌의 수직계열화 구조는 AI 시대의 이상적인 기업 모델이다. 미국 빅테크들이 이제야 구축하려는 구조를 우리는 이미 갖고 있다. 물론 개선해야 할 점은 많지만, 기본 틀은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의 강점을 인정하고, 이를 AI 시대에 맞게 발전시켜 나가는 자신감이다. 더 이상 미국이나 일본을 무작정 따라가려 하지 말고, 우리만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한국의 재벌 구조가 21세기 AI 시대의 표준이 될 수도 있다.

재벌의 역습이 시작됐다. 구닥다리 취급받던 한국식 수직계열화가 AI 시대의 핵심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구조의 장점을 살리면서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다. 투명성, 공정성, 지속가능성을 갖춘 한국형 수직계열화 모델을 만든다면, 한국 기업들은 AI 시대를 선도하는 글로벌 리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Vertical Integration Works for Apple - But It Won’t for Everyone” - Knowledge at Wharton (2012)

“How Apple Made ‘Vertical Integration’ Hot Again” - TIME (2012)

“What Is Vertical Integration? Types and Examples” - Shopify (2024)

“Apple Silicon: Why tech giants engage in vertical integration” - The Common Sense Network (2020)

“Big Tech” - Wikipedia (2025)

“AI Integration and Modularization” - Stratechery by Ben Thompson (2024)

“Amazon’s Vertical Integration: What’s the Deal and What Can Small Businesses Learn?” - Eightception (2025)

“Unleashing the Power of Apple Intelligence: How Apple’s Vertical Integration Pushes the Envelope of AI and Machine Learning” - Chilitechno (2024)

“The Benefits of Vertical Integration As Evidenced by Apple’s Intent to Purchase Assets from Dialog” - Benchmark International

“Google’s Path to Vertical Integration with Tensor SoC - Become Apple or Stay Google?” - Counterpoint Research

“CHAEBOL OF SOUTH KOREA” - San Jose State University

“What Are Chaebol Structures in South Korea?” - Investopedia

“Why Are South Korea’s Chaebol Important?” -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2018)

“South Korea’s Chaebols: A Tale of Power, Innovation, and Legacy” - Arthvidya (2024)

“How a Chaebol Samsung Became 23% of South Korea’s GDP” - Braumiller Law Group (2025)

“Korean Chaebols explained: the empires of South Korea” - Daxue Consulting (2024)

“Top 10 chaebol chiefs: driving conglomerates in South Korea” - Business Chief Asia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