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해지는 기술, 강해지는 유통 — 만능 소프트웨어 시대에 무엇이 남는가

2026년 6월 12일 금요일 저녁, 워싱턴에서 편지 한 통이 발송됐다.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이 앤스로픽에 보낸 수출통제 지시였다. 내용은 간단했다. 사흘 전 공개한 최신 모델 두 개를 외국 국적자에게 제공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미국 밖에 있는 사람뿐 아니라 미국 안에 있는 외국인, 심지어 앤스로픽에서 일하는 외국 국적 직원까지 포함됐다. 회사는 국적으로 사용자를 걸러낼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두 모델을 전 세계에서 껐다.
편지 한 통과 몇 시간. 지구상의 모든 사용자에게서 최첨단 지능이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이다. 2주 뒤 상무부는 승인된 조직의 명단을 부록에 적어 그들에게만 접근을 다시 열어주었고, 6월 30일 통제를 해제했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서한에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범위를 재조정하겠다는 권한을 명시적으로 남겨두었다. 명단도 언제든 바꿀 수 있다고 적었다.
이 사건은 곧 잊힐 것이다. 모델은 돌아왔고 서비스는 복구됐다. 그러나 그 며칠 동안 드러난 것은 사건 자체보다 오래 남는다. 기술이라는 자산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소프트웨어가 독립된 상품이 된 지 대략 60년, 산업이 된 지 70년이 되어간다. 그 시간 동안 이 바닥의 규칙은 한결같았다. 남이 못 만드는 것을 만들면 회사가 된다. 그런데 지금, 기술 하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한 자산이 되었다. 만능에 가까운 소프트웨어 하나가 수만 개 기업의 존재 이유를 흡수해버렸고, 그 소프트웨어는 두 나라 정부의 수출 통제 목록 위에 올라가 있다. 기술을 가진 자는 몇 되지 않고, 나머지는 그 몇 곳에 세를 내며 산다.
기술이 약해지는 시대에 무엇이 강해지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그리고 답은 뜻밖의 곳에 있다. 우리가 가장 낮춰 보던 사업, 만들지도 않고 붙여주기만 한다고 흉보던 사업, 창업 피칭에서 꺼내면 투자자의 표정이 굳던 사업들을 살펴봐야 한다.
미리 결론의 한 조각을 꺼내 놓겠다. 지난 10년간 남의 클라우드를 팔아 왔다고 평가절하되던 한국의 회사들이 있다. 그들이 그 10년 동안 실제로 쌓은 것은 마진이 아니라 유통망이었다. 그리고 지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지능을 만든 회사들조차 한국 기업에 닿으려면 그 망을 지나가야 한다.
70년 만에 가장 약해진 비즈니스
소프트웨어에 처음 가격표가 붙은 것은 1969년이다. IBM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분리해 팔기 시작하면서 코드가 상품이 됐다. 그 뒤 반세기 동안 이 산업이 굴러간 원리는 단순했다. 어려운 문제를 남보다 먼저, 남보다 잘 푸는 것이다.
압축 코덱이 회사가 됐다. 검색 랭킹이 회사가 됐다. 추천 엔진이 회사가 됐다. 문자 인식과 기계 번역이 회사가 됐고, 스팸 필터와 문서 요약이 회사가 됐으며, 음성 합성과 얼굴 검출과 이상 탐지가 각각 회사가 됐다. 이 하나하나가 논문이었고 특허였고 수십 명의 박사와 수년의 시간을 요구하는 진입 장벽이었다. 그 장벽 안쪽에서 수만 개의 기업이 먹고살았다. 어떤 회사는 상장까지 했다. 하나의 기능이 하나의 회사였던 시대다.
지금 저 목록을 다시 읽어보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전부 프롬프트 한 줄이다. 별도의 모델도, 별도의 팀도, 별도의 데이터셋도 필요 없다. 언어모델에 도구를 몇 개 붙이고 루프를 돌리면 대부분이 그럭저럭 처리된다. 완벽하지 않다는 반론은 큰 의미가 없다. 저 항목 하나로 먹고살던 회사들의 제품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고객은 완벽함이 아니라 충분함을 산다.
더 중요한 것은 저 기능들 사이의 접착제까지 사라졌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여러 기능을 조합해 하나의 업무를 완성하려면 통합이 필요했다. 그 통합 자체가 또 하나의 산업이었다. 컨설팅과 SI와 미들웨어가 거기서 먹고살았다. 지금은 에이전트 하나가 도구 몇 개를 붙들고 루프를 돌면서 통합까지 해버린다. 기능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능을 잇는 일까지 사라졌다.
범용 기술의 무서운 점은 특화 기술보다 잘한다는 데 있지 않다. 특화 기술의 존재 이유를 지운다는 데 있다. 증기기관이 그랬고 전기가 그랬다. 공장마다 있던 물레방아 기술자와 축동력 배치 전문가는 사라졌다. 그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풀던 문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산업의 해자는 지난 60년간 네 번 변했다. 처음에는 하드웨어에 붙어 있었다. 그다음에는 패키지와 라이선스로 옮겨갔다. 인터넷이 오자 네트워크 효과로 옮겨갔고, 클라우드가 오자 구독과 데이터 축적으로 옮겨갔다. 그때마다 해자는 자리를 옮겼을 뿐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에 변모한 해자는 소프트웨어 회사의 마당 밖으로 나가버렸다. 모델을 가진 몇 곳의 마당으로 갔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체감하고 있다. 기술 격차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있다는 것도 안다. 프론티어 모델과 오픈 가중치 모델의 성능 차이는 이제 몇 달 단위로 좁혀졌고, 중국의 오픈 모델은 미국 최상위 모델의 뒤를 바짝 따라붙는다. 어제의 최첨단이 반년 뒤에는 누구나 내려받을 수 있는 파일이 된다. 기술로 벽을 세운다는 발상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
그런데 진짜 변화는 성능이 아니라 원가에서 일어났다.
지난 30년간 소프트웨어가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업이었던 진짜 이유는 기술 우위가 아니었다. 원가 구조였다. 한 번 만들면 무한히 복제된다. 고객이 한 명 늘어도 비용은 거의 늘지 않는다. 그래서 매출총이익률이 80퍼센트, 90퍼센트가 나왔다. 이 숫자 하나가 실리콘밸리라는 문명 전체를 지탱했다. 벤처 투자도, 성장 우선 전략도, 적자를 감수하는 무료 배포 경쟁도 전부 저 원가 구조 위에 세워진 건축물이었다. 사용자를 먼저 모으면 나중에 이익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믿음이 성립했던 것은, 사용자를 늘리는 데 드는 한계비용이 거의 0이었기 때문이다.
그 건축물이 지금 무너지고 있다. 아이코닉 그로스가 2026년 초에 내놓은 조사를 보면, AI 제품의 평균 매출총이익률은 52퍼센트다. 추론 비용이 매출의 23퍼센트를 가져간다. 백만 달러를 벌면 이십삼만 달러가 엔지니어 월급을 주기도 전에 모델 회사로 빠져나간다는 뜻이다. 순수 AI 기업의 매출총이익률은 50퍼센트대 후반에 머문다. 전통적인 SaaS 기업들도 AI 기능을 붙이는 순간 몇 퍼센트포인트씩 이익률이 깎여나가고 있고, 결산 발표 때마다 그 사실을 실적 자료에 적어 넣기 시작했다.
현장의 사례는 더 직관적이다. 초기 깃허브 코파일럿은 헤비 유저 한 명당 월 수십 달러의 손실을 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정액 요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사용량 기반 과금으로 바뀌었다. 노션도, 젠데스크도, 세일즈포스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무제한이라는 단어가 소프트웨어 가격표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개발 도구 업계에서 토큰맥싱이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좋은 제품을 만들수록 토큰을 더 쓰고, 토큰을 더 쓸수록 남는 게 없다.
이 상황이 특정 회사의 전략 실패라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구조의 문제다. 소프트웨어 회사가 좋은 제품을 만드는 방법은 이제 모델을 더 많이, 더 좋은 것으로, 더 여러 번 부르는 것이다. 제품 품질을 올리는 레버와 원가를 올리는 레버가 같은 레버가 되어버렸다. 과거에는 좋은 제품을 만들수록 마진이 좋아졌다. 지금은 좋은 제품을 만들수록 마진이 나빠진다. 이 반전이 지난 30년의 소프트웨어 경영 상식 대부분을 무효로 만든다.
추론 비용은 계속 떨어질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사실이다. 같은 성능을 내는 데 드는 토큰당 비용은 매년 극적으로 싸진다. 그러나 이것은 위안이 되지 못한다. 값이 싸지는 것은 어제의 모델이고, 고객이 원하는 것은 오늘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이전트 구조가 보편화되면서 사용자 행동 하나가 부르는 모델 호출 횟수는 몇 배씩 늘어난다. 단가는 떨어지고 사용량은 그보다 빨리 늘어난다. 러닝머신 위에서 뛰는 것과 같다.
이 숫자들의 의미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소프트웨어가 원가를 갖게 되었다. 팔면 팔수록 비용이 비례해서 늘어난다. 한 번 만들어 무한히 복제한다는 명제가 깨졌다. 그렇다면 오늘의 AI 소프트웨어 기업은 대체 무슨 사업을 하고 있는가? 남에게서 지능을 떼어다가, 약간의 가공을 붙이고, 마진을 얹어서, 자기 고객에게 되파는 사업이다.
기술 기업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체는 모델 회사의 대리점에 가깝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논의의 출발점이다. 공급자는 서너 곳뿐이고, 그 공급자들은 언제든 가격표를 바꿀 수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고객에게 직접 팔 수도 있다. 취급하는 물건은 경쟁사가 취급하는 것과 같은 물건이다. 그리고 고객에게 닿는 길목마저 자기 것이 아니다. 앱스토어를 거치고, 검색을 거치고, 클라우드 마켓플레이스를 거친다. 원가는 공급자가 정하고, 판로는 플랫폼이 쥐고 있으며, 남는 것은 그 사이의 좁은 틈이다.
이것이 지금 기술 기업이 처한 자리다. 기술을 판다고 믿었는데 실은 남의 지능을 배달하고 있었고, 배달할 길조차 빌려 쓰고 있었다.
이 진단을 받아들이면 지난 몇 년간의 논쟁 하나가 정리된다. 이른바 래퍼 논쟁이다. 모델 위에 얇은 껍데기를 씌운 제품은 가치가 없다는 주장과, 껍데기야말로 사용자가 실제로 만지는 것이므로 가치가 있다는 반박이 오갔다. 두 주장 모두 초점이 어긋나 있다. 문제는 껍데기의 두께가 아니라 껍데기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다. 그 안에 우리 회사만 가진 데이터와 관계와 자산이 들어 있다면 얇아도 상관없다. 그 안에 프롬프트뿐이라면 아무리 두꺼워도 소용없다.
팔란티어의 알렉스 카프는 2026년 7월 1일 CNBC 방송에서 이 상황을 거칠게 요약했다. 기업들이 아무런 가치도 만들지 못하는 토큰에 돈을 지불하면서, 그 대가로 자기 데이터와 경쟁 우위를 프론티어 연구소에 넘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처방, 즉 팔란티어의 온톨로지가 유일한 해법이라는 주장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진단만큼은 정확하다. 토큰을 사는 것과 능력을 갖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지금 수많은 기술 기업이 전자를 후자로 착각하고 있다.
모델이 무기가 되고, 동맹이 등급이 되는 순간
여기에 두 번째 문제가 겹친다. 저 서너 곳의 공급자가 사실은 두 나라의 국가 자산이라는 문제다.
6월의 수출통제는 실수도 사고도 아니었다. 그 조치는 하나의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프론티어 모델은 상품이 아니라 통제 품목이라는 사실이다. 이후 미국은 승인된 조직의 명단을 만들어 그들에게만 최상위 모델을 열어주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이름과 자격을 심사해 등급을 매기고, 등급에 따라 다른 물건을 파는 방식이다. 미국 정부가 다른 회사에도 최신 모델의 공개 범위를 제한할 것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것이 한 회사에 대한 일회성 조치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해졌다.
중국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상무부 주도로 알리바바, 바이트댄스, Z.ai 같은 기업들과 회의가 열렸고, 자국 최고 성능 모델에 대한 해외 접근을 제한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오픈 가중치 모델까지 포함해서다. 중국 법학자들이 제안하고 대법원 저널에 실린 안은 세 단계로 나뉜다. 기본적인 오픈소스 도구는 단순 신고만 하면 되고, 중간 수준의 기술은 안보 심사를 받아야 하며, 최상위 프론티어 모델은 아예 공개를 금지하거나 국내 전용으로 묶는다는 것이다. 모델 기술의 유출이나 절취를 국가안보법상의 범죄로 다루는 방안, 자국 AI 스타트업에 누가 투자할 수 있는지를 제한하는 방안까지 함께 논의됐다. 같은 시기 알리바바는 자사 직원의 클로드 코드 사용을 사내에서 금지했다.
여기서 짚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이 등급표를 만드는 나라가 왜 둘뿐인가? 프론티어 모델을 훈련할 수 있는 나라가 사실상 둘뿐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가속기와 전력과 자본이다. 이 셋을 동시에 갖춘 곳이 미국과 중국이다. 유럽도, 일본도, 한국도 이 목록에 없다. 반도체 산업이 몇 나라로 좁혀지는 데 40년이 걸렸다면, 모델 산업은 5년 만에 두 나라로 좁혀졌다.
그동안 개방은 중국의 전략이었다. 모델을 공짜로 뿌려서 세계의 개발자를 자기 생태계에 묶는 방식이다. 그 전략을 스스로 접겠다는 논의가 나온다는 것은, 중국 역시 모델을 상품이 아니라 자산으로 다시 분류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새로운 문법이 아니다. 무기 수출의 문법이다.
미국은 F-22 랩터를 단 한 대도 수출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우방에게도 팔지 않았다. 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이다. 대신 F-35를 만들어 팔았다. 다만 똑같이 팔지 않았다. 개발 분담금과 신뢰 수준에 따라 참여 등급을 나누고, 등급에 따라 기술 정보 접근과 산업 참여의 폭을 달리했다. 영국이 최상위였고, 이탈리아와 네덜란드가 그다음이었으며, 터키와 캐나다와 호주와 노르웨이가 그 아래였다. 이스라엘만이 예외적으로 자국 시스템을 기체에 통합할 권한을 얻어 별도 형상의 기체를 운용한다. 그리고 터키가 러시아제 방공 시스템을 도입하자 미국은 터키를 프로그램에서 그냥 쫓아냈다. 이미 낸 돈도, 이미 만들던 부품도 소용없었다.
냉전기에는 코콤이 있었다. 서방이 공동으로 관리하던 대공산권 수출 금지 목록이다. 1994년 해체된 뒤 바세나르 체제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1990년대 내내, 강력한 암호 기술은 미국의 군수품 목록에 올라 있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암호 알고리즘을 해외로 내보내는 것은 무기를 수출하는 것과 같은 절차를 밟아야 했다. 소프트웨어가 군수품으로 취급받던 시절이 이미 한 번 있었다는 뜻이다. 당시 정부의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 코드는 물건과 달라서 국경에서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의 시도가 실패한 이유는 분명하다. 암호 알고리즘은 종이에 적어 들고 나갈 수 있는 수백 줄의 코드였다. 티셔츠에 인쇄해 국경을 넘은 사람도 있었다. 국경에서 막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모델은 다르다. 가중치 파일은 확실히 복제된다. 그러나 최상위 모델을 실제로 돌리려면 수만 장의 가속기와 그것을 감당하는 전력과 냉각이 필요하다. 파일은 국경을 넘지만 데이터센터는 넘지 못한다. 1990년대의 암호와 달리 2026년의 모델은 통제가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 대상이다. 미국이 이번에 그 사실을 시험해 본 것이고, 중국이 같은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언어모델이 그 목록에 올랐다. 달라진 것은 속도다. 전투기 수출 심사는 몇 년이 걸린다. 그동안 판매국도 구매국도 상황을 파악하고 대비할 시간이 있다. 모델은 금요일 저녁 편지 한 통으로 전 세계에서 사라진다. 월요일 아침 출근한 개발자가 어제까지 쓰던 API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통보된다.
한국 기업의 관점에서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말해야 한다. 우리가 만드는 서비스의 두뇌는 남의 나라 라이선스 등급표 위에 얹혀 있다. 그 등급표에 우리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등급표는 예고 없이 바뀔 수 있고, 실제로 바뀌었으며, 담당 장관은 다시 바꿀 권한을 문서에 명시해 두었다. 이것은 벤더 리스크가 아니다. 조달 담당자가 이중화 설계로 관리할 수 있는 종류의 위험이 아니다. 지정학 리스크다.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자. 공공기관의 AI 시스템을 구축해 납품했다고 하자. 계약서에는 성능 지표가 적혀 있고, 그 지표는 특정 모델을 전제로 산정됐다. 그런데 어느 금요일 저녁, 그 모델이 등급표에서 내려간다. 대체 모델을 붙이면 지표가 나오지 않는다. 계약 불이행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것은 가정이 아니다. 지난 6월에 실제로 며칠간 벌어졌던 일이고, 그때는 운 좋게 2주 만에 풀렸을 뿐이다.
물론 대안 모델을 붙여두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다. 부분적으로는 맞다. 그러나 최상위 모델이 필요한 작업일수록 대체가 어렵고, 최상위 모델이 필요 없는 작업이라면 애초에 그 사업의 기술 해자가 크지 않다는 뜻이다.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모델에 깊이 의존할수록 제품은 좋아지지만 주권은 얇아진다. 얕게 의존할수록 주권은 지키지만 제품은 평범해진다.
이 지점에서 국산 파운데이션 모델 논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남의 등급표에 이름을 올리는 대신 내 등급표를 만들자는 발상이다. 방향은 옳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그것은 국가 단위의 대응이지 기업 단위의 대응이 아니다. 프론티어 모델 한 세대를 훈련하는 비용은 웬만한 중견기업의 시가총액을 넘어선다. 대부분의 회사는 국산 모델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사업을 멈출 수 없다.
그러니 기업 단위에서는 질문의 형태 자체를 바꿔야 한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저 등급표 바깥에 있는가?
나까마의 복권
산업을 크게 셋으로 나눠 보자. 서비스, 제조, 유통이다. 우리가 하는 디지털 사업은 서비스에 속한다.
서비스업은 두뇌 전체를 빌려 쓴다. 판단하고, 쓰고, 만들고, 대답하는 일이 사업의 전부이고, 그 일을 지금 모델이 한다. 의존도가 가장 높다. 모델 가격이 두 배가 되면 이익이 사라지고, 모델 접근이 끊기면 제품이 멈춘다.
제조업은 중간이다. 설계와 검사와 공정 최적화에 두뇌를 빌려 쓰지만 몸은 자기 것이다. 금형과 라인과 숙련공은 여전히 자기 자산이다. 모델이 잠시 끊겨도 컨베이어는 돈다. 다만 미래로 갈수록 제품 안에 두뇌가 들어가야 하고, 그 두뇌는 결국 남의 것이다. 자동차든 로봇이든 가전이든, 지능을 탑재하는 순간 그 제조사는 모델 공급자의 영향권으로 한 걸음 들어간다.
유통은 다르다. 유통은 두뇌를 거의 쓰지 않는다. 수요 예측이나 배차 최적화에 모델을 쓰면 좋지만, 안 써도 사업이 돌아간다. 20년 전에도 돌아갔고 200년 전에도 돌아갔다. 모델 가격이 열 배로 뛰어도, 등급표에서 이름이 빠져도, 유통은 어제와 같은 시각에 트럭을 출발시킨다.
정리하면 순서는 명확하다. 서비스는 두뇌를 빌리고, 제조는 두뇌를 사서 심고, 유통은 두뇌 없이도 돌아간다. LLM 의존도가 높은 순서가 곧 지정학적 취약도가 높은 순서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가장 유망하다고 믿어온 순서와 정확히 반대다.
우리는 유통업을 낮춰 불렀다. 나까마라 했고, 중간상이라 했고, 브로커라 했다. 만들지도 않으면서 붙여주기만 하고 몇 퍼센트를 떼어 간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마진은 잘해야 한 자릿수다. 사업 구조는 단순해 보이고, 자랑할 기술은 없어 보인다. 기술 컨퍼런스에서 발표할 거리가 없는 사업이다. 창업 피칭에서 우리는 유통을 합니다라고 말하면 투자자의 표정이 굳던 시절이 불과 몇 년 전이다.
나까마라는 말은 일본어 나카가이에서 왔다고 알려져 있다. 중간에서 사고파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노량진 수산시장의 중도매인, 가락시장의 경매 참여자, 동대문 새벽 도매상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이 하는 일을 겉에서 보면 단순하다. 물건을 받아서 넘긴다. 그런데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오늘 어느 배가 무엇을 얼마나 싣고 들어오는지 알아야 하고, 어느 식당이 이번 주에 무엇을 얼마나 쓸지 알아야 하고, 값이 튀는 날 누구에게 먼저 물건을 줘야 다음 달에도 거래가 유지되는지 알아야 한다. 이 판단들은 시장 안에서 20년쯤 살아야 몸에 붙는다.
그런데 지금, 그 한 자릿수가 세상에서 가장 방어 가능한 이익이 되어가고 있다.
미국 의약품 유통을 보자. 매케슨과 센코라와 카디널헬스, 이 세 회사가 미국 처방약 유통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영업이익률은 1퍼센트대에 불과하다. 매출 백 원에 이익이 한 원 남짓 남는 사업이다. 그런데 아무도 이 시장에 들어가지 못한다. 수십 년째 세 곳 그대로다. 왜 그런가? 전국 단위의 창고와 냉장 체인과 배송망이 있어야 하고, 주마다 다른 규제 면허가 있어야 하고, 마약류 유통 감시와 리콜 추적 체계가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제약사와 약국과 병원 수만 곳과 맺어둔 계약과 신용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중 어느 하나도 코드로 생성되지 않는다. 이익률 1퍼센트짜리 사업이, 이익률 80퍼센트짜리 소프트웨어 사업보다 훨씬 더 두꺼운 벽에 둘러싸여 있다.
쿠팡을 보자. 지난 10여 년간 물류망에만 6조 원이 넘는 돈을 쏟아부었다. 전국 260개 시군구 가운데 182곳이 로켓배송 권역에 들어왔다. 이 숫자를 만드는 데 10년과 조 단위 적자가 들었다. 어떤 모델도, 어떤 에이전트도 이 숫자를 생성해내지 못한다. 창고는 프롬프트로 지어지지 않는다.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가 한국 시장을 두드릴 때 가장 넘기 힘들었던 벽도 가격이 아니라 이 물리적 격차였다.
언어모델은 코드를 쓴다. 트럭을 몰지 않는다. 새벽 3시에 냉동 창고 온도를 확인하러 가지 않는다. 20년 거래한 도매상이 이번 달만 결제를 늦추겠다고 할 때 그러시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명절 직전에 물량이 몰릴 것을 알고 미리 창고를 비워두지 않는다. 유통의 해자는 학습 데이터 안에 없다. 물리와 시간과 신뢰로 만들어져 있고, 이 셋은 지능으로 압축되지 않는다.
유통의 해자를 조금 더 정확히 분해해 보자. 세 겹이다.
첫 겹은 물리다. 창고와 차량과 냉장 설비와 통관 절차와 재고가 여기에 속한다. 이것들은 돈과 시간을 동시에 요구한다.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허가와 부지와 인력이 함께 필요하고, 그것들은 지도 위의 특정 좌표에 묶여 있다. 복제 비용이 0이 아니라 매우 크다.
둘째 겹은 면허와 규제다. 의약품을 다루려면 자격이 있어야 하고, 주류를 다루려면 또 다른 자격이 있어야 하며, 위험물을 다루려면 또 다르다. 이 자격들은 대개 사고 없이 오래 해왔다는 이력으로만 얻어진다.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없는 영역이다.
셋째 겹이 가장 두껍다. 신용이다. 누가 결제를 미루는지, 누가 반품을 악용하는지, 누가 급할 때 물건을 빼주는지. 이 정보는 어느 데이터베이스에도 없고 어느 학습 데이터에도 없다. 수십 년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쌓인 것이고, 회사가 아니라 담당자의 머릿속에 있다. 그래서 유통 회사를 인수해도 사람이 나가면 사업이 무너진다.
지능은 복제된다. 신용은 복제되지 않는다. 이 문장이 앞으로 10년의 핵심이다.
한 가지 더 짚어둘 것이 있다. 유통과 기술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아마존은 서점으로 시작한 유통 회사였다. 그 회사가 지금 세계 최대의 클라우드 사업자다. 유통이 기술을 흡수한 것이지 기술이 유통을 흡수한 것이 아니다. 물류를 돌리다 보니 서버가 필요했고, 서버를 잘 돌리다 보니 남에게 팔게 됐다. 네트워크를 가진 자가 기술을 사거나 만드는 것은 쉽다. 기술을 가진 자가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은 어렵다. 이 비대칭이 지금 다시 중요해졌다.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증거는 아주 깊은 곳에 있다.
러시아 알타이 산맥에 데니소바 동굴이 있다. 데니소바인이라는 인류종의 이름이 나온 그 동굴이다. 노보시비르스크 고고민족학연구소의 막심 코즐리킨과 동료들은 이 동굴에서 4만 5천 년에서 5만 년 전 지층을 파다가 작은 구슬들을 찾아냈다. 지름이 1센티미터도 안 되는 구슬에 정교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재료는 타조알 껍데기였다.
문제는 알타이에 타조가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타조는 훨씬 남쪽과 동쪽, 몽골 초원과 자바이칼 일대에 살았다. 직선거리로 1천 킬로미터가 넘는다. 발굴자들은 껍데기가 통째로 들어왔는지 이미 만들어진 구슬이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지만, 어느 쪽이든 결론은 같다고 보았다. 알타이 동굴의 사람들에게는 바깥 세계와 연결된 교환망이 있었다는 것이다. 같은 지층에서는 짙은 녹색 돌로 만든 팔찌도 나왔는데, 그 원석의 산지 역시 수백 킬로미터 밖이다.
빙하기 유라시아에서 1천 킬로미터를 이동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도도 없고 길도 없고 말도 없다. 한 사람이 그 거리를 왕복했을 리는 없다. 여러 집단이 손에서 손으로 물건을 넘겼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각자 자기 영역 안에서 이웃 집단과 거래하고, 그 이웃이 다시 그다음 이웃과 거래하는 방식이다. 중간에 선 자들이 조금씩 이문을 남기며 물건을 다음 사람에게 넘긴다.
이것이 유통이다. 구조가 지금과 똑같다. 4만 5천 년 전 알타이의 구슬은 도매와 중매와 소매를 거쳐 도착한 물건이다. 우리가 나까마라고 부르며 낮춰 보던 그 자리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 구슬이 동굴까지 온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대비가 하나 있다. 고고학이 오래전부터 주목해 온 사실인데, 네안데르탈인이 쓰던 석기의 원석은 대개 수십 킬로미터 안쪽에서 왔다. 그들도 도구를 정교하게 만들었고 불을 다뤘고 죽은 자를 묻었다. 그러나 물건은 멀리 가지 않았다. 사피엔스의 유물은 다르다. 원석과 조개껍데기와 장신구가 수백, 때로는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한다. 두 인류종을 가른 것은 지능의 크기가 아니라 낯선 자와 거래하는 능력이었을 수 있다는 가설이 여기서 나온다.
흥미롭게도 데니소바 동굴은 그 다른 인류종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같은 동굴에서 데니소바인과 네안데르탈인과 사피엔스의 흔적이 겹쳐 나온다. 누군가는 그 동굴에 머물렀고, 누군가는 1천 킬로미터 밖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후자의 후손이다.
유통은 문명이 만들어진 뒤에 생겨난 부산물이 아니다. 낯선 자를 만나 죽이지 않고 물건을 바꾸는 능력, 오늘 내준 것을 언젠가 돌려받으리라 믿는 능력. 이 두 가지 위에 우리 종의 모든 것이 세워졌다. 그러니 이 사업이 사라질 리가 없다.
그래서 이 사업은 사라지지 않는다. 언어모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 와도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는 계속 바뀐다. 등짐에서 낙타로, 낙타에서 범선으로, 범선에서 컨테이너로, 컨테이너에서 새벽배송으로 바뀌어 왔다. 그러나 누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그것을 가져다 놓는 자리는 한 번도 비어 있던 적이 없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 새로운 유통 카테고리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토큰 유통이다.
유통의 역사에서 총판은 늘 같은 자리를 지켜왔다. 잉그램마이크로와 TD시넥스는 40년 전 PC 부품을 떼어다 팔던 회사들인데, 지금도 세계 IT 유통의 중심에 서 있다. HPE는 올해 전 세계 유통 파트너를 단 두 곳으로 정리해 발표했고, 그 두 곳이 바로 이들이었다. 세계 최대의 IT 제조사조차 자기 물건을 자기 힘만으로 팔지 않는다. 만드는 자는 결국 파는 자를 거쳐야 한다.
한국에서 같은 자리를 지켜온 회사들이 있다. 메가존클라우드, 베스핀글로벌, 클루커스 같은 클라우드 관리형 서비스 사업자들이다. 이들이 지난 10년간 한 일의 본질은 유통이었다. AWS와 애저와 구글 클라우드의 자원을 떼어다가, 한국 기업의 언어로 통역하고, 계약과 청구와 보안 심사를 대신 처리하고, 장애가 나면 새벽에 전화를 받았다. 마진은 한 자릿수였고, 기술 컨퍼런스에서 자랑할 거리는 없었다. 그저 남의 클라우드를 팔았을 뿐이라는 평가를 종종 들었다.
그런데 그들이 그 10년 동안 실제로 쌓은 것은 마진이 아니었다. 수천 개 한국 기업의 인프라 안쪽에 들어가 있는 접근 권한이었고, 그 기업들의 조달 담당자와 보안 담당자와 CTO의 전화번호였으며, 어느 회사가 어떤 워크로드를 어떻게 돌리는지에 대한 지식이었다. 이것은 유통망이다. 그리고 모델 회사가 한국 시장에 팔려면 반드시 이 망을 지나가야 한다.
토큰 유통은 클라우드 유통의 다음 장이다. 모델을 만드는 회사는 미국과 중국에 있고, 그 모델을 쓸 기업은 한국에 있으며, 그 사이를 잇는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지 않다. 오히려 더 중요해졌다. 클라우드는 리전과 계정만 열면 쓸 수 있었지만, 모델은 어느 등급까지 열려 있는지, 데이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어제 쓰던 모델이 오늘도 살아 있는지를 누군가 대신 봐줘야 한다. 이 일은 지능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관계와 계약과 책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AWS와 애저와 구글 클라우드가 프론티어 모델의 유통 채널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지능을 만든 회사조차 자기 힘만으로는 세계의 모든 기업에게 닿지 못한다. 계약을 맺고, 청구서를 발행하고, 보안 심사를 통과하고, 장애가 나면 전화를 받아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잉그램마이크로는 상장 서류에 이렇게 적었다. 기술이 복잡해질수록 유통의 중요성은 계속될 것이며, 클라우드 시대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그때는 상투적인 문장으로 읽혔다. 지금 다시 읽으면 예언에 가깝다.
다시 세어야 할 자산 목록
여기서 당연한 반론이 나온다. 로봇은? 물리 AI는? 창고 자동화와 자율주행이 완성되면 유통의 해자도 결국 녹아내리는 것 아닌가?
이 반론은 절반만 맞다. 로봇과 자율주행이 유통의 운영 효율을 크게 바꿀 것이라는 점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유통사의 원가를 낮출 뿐 유통사의 자산을 빼앗지 않는다. 창고에 로봇을 넣으려면 먼저 창고가 있어야 한다. 자율주행 트럭을 굴리려면 먼저 노선과 물량과 화주가 있어야 한다. 지능이 싸지면 지능을 얹을 몸뚱이의 값이 오른다. 로봇이 등장하는 세계에서 가장 유리한 쪽은 로봇을 만든 회사가 아니라 로봇을 놓을 자리를 이미 가진 회사다. 아마존이 창고 로봇 회사를 사들인 것이지, 창고 로봇 회사가 아마존을 사들인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자산 목록을 다시 써야 한다. 우리 회사가 가진 것 중에서 모델이 복제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세어봐야 한다. 알고리즘은 아니다. 이미 생성된다. UI도 아니다. 이미 생성된다. 워크플로도 아니다. 곧 생성된다. 남는 것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첫째는 물리적 네트워크다. 창고와 차량과 설치 기사와 수리 조직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는 규제 면허와 인증이다. 의료와 금융과 방산과 공공에서 몇 년씩 걸려 따낸 자격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는 오래된 신용 관계다. 외상을 주고받고 반품을 받아주고 납기를 지켜온 이력이 여기에 쌓여 있다. 넷째는 설치 기반이다. 이미 고객의 공장과 사무실과 병원에 들어가 돌아가고 있는 우리 물건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섯째는 우리가 소유한 데이터와 그 위에 얹힌 명세다. 우리 회사가 무엇을 정답이라고 부르는지를 기계가 읽을 수 있는 형태로 적어둔 정의를 말한다.
이 목록에 적을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 회사는 사실 모델 회사의 대리점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이 목록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회사가 자랑스러워하는 것과 회사를 지켜주는 것이 대개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것은 대개 기술이고,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대개 관계다. 자산 목록을 다시 쓴다는 것은 그 불편한 사실을 회의실 화이트보드에 적는다는 뜻이다.
둘째, 소프트웨어 기업은 유통업의 논리를 배워야 한다. 이 문장이 모욕처럼 들린다면 그것이 바로 문제의 일부다. 유통업이 살아남는 이유는 마진이 높아서가 아니다. 네트워크가 자기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소프트웨어 기업 대부분은 남의 네트워크 위에 세워졌다. 앱스토어 위에, 검색 위에, 모델 API 위에. 매출총이익률이 52퍼센트라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다. 그 52퍼센트를 공급자가 언제든 30퍼센트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문제다. 마진의 크기가 아니라 마진의 소유권을 봐야 한다.
카프가 말한 것도 결국 이 얘기다. 토큰을 사는 회사는 매달 돈을 내면서 자기 지식을 조금씩 상대방 쪽으로 옮기고 있다. 그의 해법이 온톨로지 하나뿐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명세와 검증의 핵심, 즉 우리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무엇이 옳은 결과인지를 기계가 읽을 수 있는 형태로 소유하는 것이 남은 몇 안 되는 해자라는 점은 분명하다. 온톨로지는 그것의 한 가지 형태일 뿐이다.
반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도 분명하다. 모델이 다음 버전에서 흡수할 것이 뻔한 기능에 회사의 미래를 거는 일이다. 지금 잘 팔리는 AI 제품 중 상당수가 모델의 결함을 메워주는 제품이다. 문맥이 짧아서, 도구를 잘 못 써서, 형식을 못 맞춰서 생긴 틈을 메우는 제품들이다. 그 틈은 다음 모델에서 닫힌다. 모델 회사의 로드맵이 곧 우리 회사의 부고인 사업은 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버려둔 산업 목록을 다시 펼쳐야 한다. 지난 20년간 우리는 수많은 사업을 낮춰 보았다. 비효율적이라고 했고, 중간 마진일 뿐이라고 했고, 디지털이 곧 대체할 것이라고 했다. 도매와 총판과 대리점이 그랬고, 물류와 보관과 통관이 그랬으며, 정비와 설치와 검침과 수리가 그랬다. 그중 상당수는 실제로 대체됐다. 그러나 대체된 것은 정보 전달 기능이었지 네트워크 자체가 아니었다. 가격을 알려주는 일은 사라졌지만 물건을 가져다주는 일은 남았다. 그리고 지금 지능이 공짜에 가까워지고 있다.
경제학에는 오래된 법칙이 있다. 보완재의 가격이 떨어지면 그 짝의 가치는 올라간다. 지능이 흔해지면 지능이 아닌 것의 값이 오른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것이 정확히 그 현상이다. 판단은 싸지고 실행은 비싸진다. 코드는 싸지고 콘센트는 비싸진다. 아이디어는 싸지고 유통망은 비싸진다.
한국은 이 전환에서 특별히 불리하지도, 특별히 유리하지도 않다. 다만 우리가 가진 것을 잘못 세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 몇 년간 한국의 산업 담론은 온통 모델과 반도체와 데이터센터에 쏠려 있었다.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국토 전체를 몇 시간 안에 연결하는 물류망, 세계 최고 수준의 통관 처리, 제조 현장과 공급망에 축적된 수십 년의 거래 관계 같은 것들은 목록에 잘 오르지 않는다. 이런 자산은 컨퍼런스에서 발표하기 민망하고 투자 설명서에 쓰기 초라하다. 그러나 이것들은 미국의 수출 통제 목록에도, 중국의 등급표에도 올라 있지 않다. 누구도 우리에게서 이것을 껐다 켰다 할 수 없다.
아서 클라크는 충분히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썼다. 우리는 그 문장이 실현된 세계에 도착했다. 그런데 클라크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마법이 흔해지면 마법은 더 이상 차별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가 지팡이를 하나씩 들고 있는 세계에서 값이 나가는 것은 지팡이가 아니다. 지팡이를 휘두를 대상, 즉 실제로 무언가를 생산하고 옮기고 파는 자산이다. 마법이 흔해질수록 마법이 닿을 곳을 소유한 자가 이긴다.
유통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 어딘가 부끄럽던 시절이 있었다. 기술이 없다는 뜻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술이 가장 강해진 바로 그 순간에, 기술을 갖지 않은 사업이 가장 단단해졌다. 4만 5천 년 전 타조알 껍데기를 손에서 손으로 1천 킬로미터 넘게 옮기던 그 일이, 지금 지구에서 가장 방어 가능한 사업 모델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역설을 이해하는 것이 앞으로 10년의 출발점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덧붙인다. 이 글은 기술을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술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지능은 앞으로 전기처럼 흔해질 것이다. 전기가 흔해졌을 때 부자가 된 것은 발전소를 지은 회사만이 아니었다. 전기를 어디에 꽂을지 알았던 회사들이었다. 모터를 어디에 달아야 공장이 빨라지는지, 냉장고를 어디에 놓아야 유통이 바뀌는지 알았던 사람들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좋은 모델이 아니라 모델을 꽂을 자리다. 그 자리는 대개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 안에 있고, 우리는 그것을 자산으로 세지 않고 있었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묻기 전에, 무엇이 대체되지 않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답은 대체로 화면 밖에 있다.
참고 자료
- Anthropic disables Fable and Mythos AI models following U.S. government export ban (Fortune, 2026.6.13)
- The Department of Commerce Restricted Access to Anthropic’s Latest Models. What Comes Next? (CSIS)
- Commerce Department greenlights partial return of Anthropic’s Mythos (Axios, 2026.6.27)
- White House lifts export control on Anthropic that froze its most advanced models (CNN, 2026.6.30)
- Did the US Government Just Set An AI Export Precedent by Blocking Mythos? (Tech Policy Press)
- China May Restrict Access to Its Most Powerful AI Models (TIME, 2026.7.7)
- China Weighs Blocking Foreign Access to Top AI Models (PYMNTS, 2026.7)
- Karp Says Frontier AI Labs Are Stealing Enterprise Value And VCs Are Listening (Forbes, 2026.7.2)
- Palantir CEO: “Something Has Gone Completely Wrong” In AI (24/7 Wall St., 2026.7.2)
- The AI COGS Problem: SaaS Gross Margin Compression 2026 (SaaS Magazine)
- AI Is Eating Software Margins: How SaaS Companies Now Have to Price In the Token Tax (Trending Topics)
- Ostrich Eggshell Beads Found in Denisova Cave (Archaeology Magazine)
- Diachronic Change in the Utilization of Ostrich Eggshell at the Late Paleolithic Shizitan Site (Frontiers in Earth Science)
- Drug Distribution Industry Trends (Morningstar)
- 쿠팡, 3조원 투자… 2027년 전국 로켓배송 쏜다 (전자신문)
- HPE unifies global distribution with Ingram Micro and TD SYNNEX (HPE, 2026.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