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0일 저녁, 바르셀로나의 밤하늘 아래에서 한 건축물이 완공을 선언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다. 1882년에 첫 삽을 뜬 이래 144년 만의 일이었다. 이 성당을 설계한 안토니 가우디는 생애의 43년을 이 건축에 바쳤고, 말년에는 아예 공사장 안의 작업실에서 먹고 자며 성당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작품이 완성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1926년 6월 7일, 여느 때처럼 미사를 보러 가던 길에 전차에 치였는데, 행색이 너무 남루한 탓에 아무도 그를 당대 최고의 건축가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빈민 병원으로 옮겨졌고 사흘 뒤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완공 선언이 이루어진 2026년 6월 10일은 정확히 그의 서거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살아생전 공사가 너무 더디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우디는 이렇게 답했다고 전해진다. 나의 의뢰인은 서두르지 않는다. 그가 말한 의뢰인은 신이었다.

가우디가 죽은 뒤에도 공사는 멈추지 않았다. 스페인 내전의 와중에 그가 남긴 설계 도면과 모형 상당수가 불탔고, 자금은 언제나 부족했으며, 성당은 국가나 교회의 예산이 아니라 오직 신자와 방문객의 기부금만으로 지어졌다. 그럼에도 몇 세대의 건축가와 석공들이 바톤을 이어받아 한 사람의 꿈을 144년 동안 밀고 나갔다. 불탄 도면은 남은 석고 모형의 파편을 퍼즐처럼 복원해 되살렸고, 가우디의 기하학은 훗날 3D 모델링 기술이 등장하고 나서야 온전히 구현될 수 있었다. 새로 완공된 중앙의 예수 그리스도 탑은 높이 172.5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회 건축물이 되었는데, 이 어중간해 보이는 높이에도 이유가 있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높은 몬주익 언덕이 해발 173미터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것이 신이 만든 것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가우디의 뜻을, 그가 죽은 지 한 세기가 지난 뒤에도 후대의 건축가들은 그대로 지켰다.

같은 시기 지구의 다른 곳에서 인류는 전혀 다른 종류의 건축에 몰두하고 있다. 인공지능이다. 수개월씩 쉬지 않고 이어지는 학습 연산, 인간의 며칠 치 고민을 몇 분 만에 끝내는 추론 모델, 사람의 업무를 통째로 대신하기 시작한 에이전트가 쏟아진다. 기술이 마법과 구분되지 않는 시대가 성큼 다가왔고, 자연스럽게 질문이 따라온다. AI가 이 정도까지 왔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대체되지 않을 직업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 바르셀로나에 서 있는 저 성당이다. 144년의 시간, 세대를 넘어 이어진 바톤, 그리고 완성을 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돌을 쌓아 올린 사람들의 집념이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AI가 끝내 넘을 수 없는 인간의 마지막 영토, 끈기와 집념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연산이 대체한 고민의 시간

먼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겉으로 보기에 AI는 이미 인간보다 더 잘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의 추론 모델들은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답을 내놓기 전에 더 오래 생각한다. 연산 시간을 늘릴수록 답의 품질이 올라간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AI 업계 전체가 모델에게 더 긴 사고의 시간을 주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사람이 5분 고민할 문제를 AI는 몇 초 만에 풀고, 사람이 한 시간을 들여야 할 분석을 몇 분 만에 끝낸다. 리서치 에이전트는 하루 종일 걸릴 자료 조사를 커피 한 잔 마시는 사이에 마치고, 코딩 에이전트는 몇 시간이고 혼자 작업을 이어간다. 과거에는 오직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었던 짧은 단위의 고민, 즉 5분의 고민과 한 시간의 고민과 하루의 고민과 일주일의 고민은 이미 AI가 대체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학습은 어떤가? 거대 모델 하나를 학습시키는 데는 수만 개의 GPU가 몇 달씩 단 1초도 쉬지 않고 돌아간다. 연산을 고민의 연장으로 본다면, AI는 몇 개월짜리 고민을 통째로 수행하는 셈이다. 인간 중에 한 가지 문제를 몇 달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바둑 AI는 인간 기사가 평생을 바쳐도 다 두지 못할 수의 대국을 몇 주 만에 소화했고,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AI는 인류의 구조생물학자들이 수십 년에 걸쳐 밝혀낸 것보다 많은 구조를 단숨에 쏟아냈다. 그러니 고민의 총량으로 따지면 AI가 인간을 이긴 것처럼 보인다. 끈기의 재료가 고민이라는 것은 맞다. 그리고 AI가 고민을 인간보다 더 많이 더 오래 수행한다면, 고민의 축적인 집념마저도 AI가 우리보다 나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고백하자면 이 칼럼을 쓰는 과정에도 AI가 있다. 자료를 뒤지고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문장을 다듬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이제 기계가 담당한다. 예전 같으면 도서관에서 며칠을 보냈을 조사가 몇 시간으로 줄었다. 이 변화를 부정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분명해진 것이 있다. 어떤 주제를 붙들고 몇 달을 굴릴지, 세상의 어떤 현상을 보며 잠을 설칠지, 쓰다가 막힌 글을 덮어 버릴지 다시 펼칠지는 여전히 온전히 필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AI를 깊이 쓰면 쓸수록 대체된 것과 대체되지 않은 것의 경계가 오히려 또렷해진다.

사실 이것은 인류에게 낯선 사건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인지 능력을 차례로 바깥에 맡겨 온 종이다. 기억은 문자에 맡겼고, 계산은 주판을 거쳐 컴퓨터에 맡겼으며, 길 찾기는 지도와 내비게이션에 맡겼다. 그때마다 인간의 자리가 사라진다는 경고가 나왔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소멸이 아니라 이동이었다. 문자가 기억을 대신하자 인간은 암송 대신 사유를 했고, 계산기가 계산을 대신하자 수학자는 셈 대신 구조를 탐구했다. 이번에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고민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물어야 한다. 고민마저 외주화된 뒤에 인간에게 남는 자리는 어디인가? 나는 그 자리가 고민의 앞과 뒤에 있다고 생각한다. 고민을 시작하게 만드는 것과, 고민이 실패로 끝난 뒤에도 붙들고 있는 것이다.

먼저 앞을 보자. AI의 고민은 언제나 남의 고민이다. 세상의 어떤 모델도 스스로 문제를 품고 새벽에 깨어난 적이 없다. 모든 연산은 누군가의 프롬프트에서, 누군가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 질문을 던지는 존재, 즉 아직 세상에 없는 것을 결핍으로 느끼고 그 결핍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존재는 여전히 인간뿐이다. 고민이라는 엔진의 배기량은 AI가 키워 주지만, 시동을 거는 열쇠는 인간의 손에 있다. 그래서 답이 흔해질수록 질문이 귀해진다. 검색이 지식을 평준화했을 때 무엇을 검색할지 아는 사람이 앞서 나갔듯이, AI가 고민을 평준화한 시대에는 무엇을 고민시킬지 아는 사람, 즉 자기 문제를 가진 사람이 앞서 나가게 된다.

여기에 범주의 착각이 숨어 있다. 데이터센터에서 6개월 동안 돌아가는 연산은 끈기가 아니다. 강물이 천 년을 흐른다고 해서 우리는 강을 성실하다고 부르지 않는다. 강은 흐르기를 선택한 적이 없고, 흐름을 멈추고 싶은 유혹을 이겨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연산도 마찬가지다. 전기가 공급되는 한 연산은 계속되고, 전기가 끊기면 연산은 멈춘다. 거기에는 지속이 있을 뿐 의지가 없다. 끈기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반드시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포기라는 선택지가 실재하고, 그 선택지가 매일 아침 눈앞에 어른거리는데도 계속하기를 다시 선택하는 것, 그것이 끈기다. AI에게는 포기할 자유가 없으므로 계속할 의지도 없다. 학습이 중단된 모델은 체크포인트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재개되지만, 인간의 중단은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 중단은 상처로 남고, 재개는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별개의 사건이다. 바로 그 일어섬의 반복이 끈기의 실체다.

그러므로 시간의 길이와 의지의 지속은 구분되어야 한다. AI가 대체한 것은 전자다. 5분에서 몇 시간에 이르는 고민의 시간, 즉 사고라는 노동은 이제 기계가 담당한다. 이것은 겸허하게 인정해야 하고, 오히려 반가워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짧은 고민의 노동에서 해방된 시간만큼 인간은 더 멀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 즉 10년의 세월을 하나의 문제에 걸고 인생을 저당 잡히는 결단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그리고 존재를 걸 수 있는 것은 걸어야 할 존재를 가진 자, 유한한 생을 사는 자뿐이다.

물려받을 수 없는 단 하나의 능력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남겼다. 인간의 지성은 유한하고 신의 지성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의지만큼은 다르다는 것이다. 무엇을 긍정하고 무엇을 부정할지, 무엇을 계속하고 무엇을 그만둘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에서만큼은 인간이 무한자에 견줄 만하며, 인간이 신을 닮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지성이 아니라 의지, 곧 자유의지라고 그는 보았다.

데카르트의 통찰에는 뒷면도 있다. 인간의 오류는 유한한 지성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무한한 의지가 뻗어 나가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유의지는 오류의 원천이다. 그런데 이 뒷면이야말로 지금 시대에 다시 읽어야 할 대목이다. 지성이 확신하지 못하는 곳으로 기어이 나아가는 힘, 틀릴 것을 알면서도 배를 띄우는 힘이 자유의지라면, 오류를 무릅쓰는 개척은 자유의지의 부작용이 아니라 본령이기 때문이다. AI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만들어진다. 오류를 최소화하도록, 확률이 높은 답을 내놓도록 최적화된다. 확률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길만 가는 존재는 지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오늘날 AI가 증명하고 있는 것은 데카르트의 전반부, 즉 지성의 작업은 기계가 인간을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후반부는 여전히 비어 있다. 어떤 AI도 스스로 무언가를 원한 적이 없고, 원하는 것을 위해 틀릴 위험을 무릅쓰거나 다른 모든 가능성을 포기한 적도 없다.

물론 자유의지 자체가 환상이라는 반론이 있다. 현대 신경과학의 일부 실험은 인간이 결정을 의식하기도 전에 뇌가 먼저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인간의 선택도 결국 뉴런의 연산이라면 AI의 연산과 무엇이 다르냐는 물음도 가능하다. 이 오래된 철학적 논쟁을 여기서 끝낼 생각은 없다. 다만 이 글의 논지에는 형이상학적 결론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만 짚어 둔다. 자유의지가 궁극적으로 환상이든 아니든, 포기라는 선택지를 실감하면서도 계속하는 존재와 포기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존재 사이의 차이는 엄연히 실재하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그만두고 싶은 유혹과 싸워 본 적 없는 존재에게 끈기라는 단어를 쓸 수는 없다. 그 싸움의 유무가 인간과 기계를 가르는 선이고, 이 선은 뇌과학이 어떤 결론을 내리든 지워지지 않는다.

자유의지에서 인간의 근성이 나오고, 근성 가운데 으뜸은 끈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불교는 이것을 근기라 부른다. 뿌리 근에 그릇 기,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수행을 밀고 나가는 그릇의 크기다. 부처는 같은 진리도 듣는 이의 근기에 맞추어 달리 설했다고 하는데, 이는 근기가 사람마다 다르며 저마다 길러 온 만큼만 담을 수 있음을 전제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근기의 출처다. 외모는 부모에게서 물려받는다. 재력도 물려받을 수 있다. 지력조차 상당 부분 타고난다. 그러나 근기만큼은 상속되지 않는다. 부모가 아무리 위대한 수행자여도 자식의 근기를 대신 키워줄 수 없고, 아무리 큰 재산으로도 근기를 사줄 수 없다. 근기는 오직 자신의 노력으로만,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하나씩 넘어서는 반복으로만 길러지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렇게 길러진 근기는 복리로 자란다. 한 번 넘어선 고비가 다음 고비를 넘는 담보가 되고, 버텨 본 기억이 버틸 수 있다는 믿음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자산 가운데 유일하게 세습이 불가능하고, 유일하게 스스로에게만 축적되는 자산인 셈이다.

이 대목에서 근기의 목록에 한 줄을 추가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외모, 재력, 지력에 이어 이제는 지능마저 외부에서 조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AI는 사실상 지력의 상속이다. 월 몇만 원이면 누구나 박사급의 분석력과 변호사급의 문서 작성 능력을 빌릴 수 있고, 이 접근성의 격차는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부모에게 물려받든 클라우드에서 빌리든, 조달 가능한 능력은 더 이상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의 목록이 길어질수록 물려받을 수 없는 것의 값은 올라간다. 실제로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같은 모델을 쓰는 사람들의 보고서는 서로 닮아가고, 같은 코딩 에이전트를 쓰는 개발자들의 코드는 비슷한 결을 갖는다. 빌린 지능의 성능이 상향 평준화될수록 결과물의 차이는 지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생한다. 그 지능에게 어떤 문제를, 어떤 방향으로, 얼마나 오래 밀고 가게 하느냐다. 모두가 같은 지능을 빌려 쓰는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마지막 기준은 결국 빌릴 수 없는 능력, 곧 근기다.

인류 문명 자체가 이 근기의 증거물이다. 문명은 상상력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상상은 누구나 한다. 하늘을 나는 꿈은 그리스 신화에도 있었지만, 그 꿈을 현실로 만든 것은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며 천 번이 넘는 활공 실험을 반복한 라이트 형제의 끈기였다. 수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한 사람은 수없이 많았지만, 실제로 대양을 건넌 것은 몇 달의 굶주림과 폭풍과 선상 반란을 견딘 소수의 항해자들이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장면이 있다. 조선소를 지을 돈을 빌리러 간 정주영이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과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 한 장으로 영국의 은행을 설득했다는 일화는, 지성의 논리로 보면 무모함의 표본이지만 근성의 논리로 보면 문명이 전진하는 방식의 표본이다. 배를 만들어 본 적 없는 나라가 조선소와 선박을 동시에 짓겠다고 나선 그 무모함 위에서 오늘의 조선 강국이 세워졌다. 문명을 만든 것은 상상을 현실 쪽으로 끝까지 밀어붙인 프론티어들이었고, 그들을 밀고 간 연료가 끈기였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공통된 것은 뛰어난 두뇌가 아니라 그만두지 않은 집념이었다.

10년의 집념이 증명한 것들

앤드루 와일스는 열 살 때 동네 도서관에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만났다. 17세기의 수학자 페르마가 책의 여백에 놀라운 증명을 발견했으나 적을 자리가 부족하다는 메모와 함께 남긴 문제로, 이후 358년 동안 인류의 어떤 천재도 증명하지 못한 난제였다. 열 살짜리도 문제 자체는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데 증명은 아무도 못 한다는 사실이 소년을 사로잡았다. 소년은 이 문제를 마음에 품은 채 자라 프린스턴의 수학 교수가 되었고, 1986년 이 문제로 가는 길이 이론적으로 열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다른 연구를 모두 접었다. 그리고 7년 동안 자기 집 다락방에 틀어박혀 동료들에게조차 비밀로 한 채 이 문제만 팠다. 1993년 케임브리지의 강연에서 증명을 발표하며 이쯤에서 멈추겠다는 한마디로 칠판을 덮었을 때, 수학자의 얼굴이 세계 신문의 1면에 실렸다. 그러나 검증 과정에서 치명적 결함이 발견되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필생의 증명이 무너져 내리는 시간을 그는 1년 넘게 견뎠고, 1994년 가을 마침내 결함을 메웠다. 훗날 와일스는 결함이 발견된 그 1년이 수학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를 살린 것은 지능이 아니었다. 지능으로 치면 358년 동안 이 문제에 도전한 수학자 중에 와일스보다 뛰어난 이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살린 것은 열 살의 마음에 품은 문제를 놓지 않은 30여 년의 집념이었다.

카탈린 카리코의 이야기는 더 쓰라리다. 헝가리 출신의 이 생화학자는 mRNA로 치료제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1985년 미국행을 택했다. 가진 것이 없어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미국행 이주 자금을 딸이 아끼던 곰 인형 속에 꿰매 숨기고 대서양을 건넜다. 그러나 학계는 그의 믿음을 조롱했다. mRNA는 너무 불안정해서 쓸모가 없다는 것이 당시의 정설이었고, 연구비 신청은 번번이 거절당했으며, 1995년에는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연구를 접든지 강등을 받아들이든지 택하라는 최후통첩을 받고 교수직에서 밀려나는 강등을 감수했다. 같은 해에 암 진단까지 받았다. 보통의 연구자라면 유망한 주제로 갈아탔을 것이다. 그는 갈아타지 않았다. 강등된 자리에서 십 년을 더 버텨 2005년 드루 와이즈만과 함께 mRNA가 일으키는 면역 거부 반응을 잠재우는 핵심 발견을 해냈고, 이 발견은 훗날 팬데믹에서 수십억 명이 접종한 백신의 토대가 되었다. 2023년 노벨 생리의학상이 두 사람에게 돌아갔을 때, 세상이 마침내 인정한 것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40년의 끈기였다. 아이디어는 일찍부터 있었다. 없었던 것은 그 아이디어를 믿어준 세상이었고, 세상이 믿어줄 때까지 버틴 사람은 카리코뿐이었다.

우리 역사에도 같은 증거가 있다. 고려는 11세기 거란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겠다는 발원으로 수십 년에 걸쳐 초조대장경을 새겼다. 그런데 이 대장경이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여기서 고려가 내린 결정이 놀랍다. 국토가 유린당하고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한 전란의 한복판에서, 불타 버린 그 대장경을 처음부터 다시 새기기로 한 것이다. 8만 장이 넘는 목판에 한 자 한 자 불경을 새기는 데 다시 16년이 걸렸다. 나라의 존망이 걸린 시기에 가장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일에 16년을 바쳤고, 한 번 잿더미가 된 일을 처음부터 반복했다. 그렇게 새겨진 팔만대장경은 8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해인사 장경판전에 온전히 남아, 효율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인간 집념의 물성을 증언하고 있다.

강등이라는 키워드로 보면 카리코보다 400년 앞선 선례도 있다.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하루아침에 백의종군의 처지로 떨어진 이순신이다. 모함으로 옥에 갇혀 고문을 받고 계급장 없이 종군하던 그에게 조정이 다시 통제사 직을 내렸을 때, 조선 수군에 남은 배는 12척이었다. 합리적 판단이라면 수군을 해체하고 육군에 합류하는 것이 맞았고 실제로 조정의 뜻도 그러했다. 그가 올린 장계의 한 문장,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는 말은 전력 보고서가 아니라 집념의 선언문이었다. 계산으로는 성립하지 않는 싸움을 성립시키는 것, 그것이 명량에서 증명된 인간의 근성이다.

비즈니스의 세계라고 다르지 않다. 제임스 다이슨은 먼지봉투 없는 진공청소기라는 아이디어 하나로 15년 동안 5,127개의 시제품을 만들었다. 5,126번의 실패라는 뜻이다. 그 사이 집을 담보로 잡혔고, 아내의 수입으로 생계를 이었으며, 기존 가전 업체들은 먼지봉투 판매 수익을 지키려고 그의 기술을 외면했다. 5,127번째 시제품이 성공한 뒤에야 세상은 그를 혁신가로 불렀다. 훗날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실패를 5,126번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 뿐이라고 답했다. 아이디어의 우열이 아니라 실패를 견디는 횟수의 우열이 승부를 갈랐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흔히 재능의 신화로 소비되지만, 심리학은 다른 결론을 내렸다. 심리학자 안데르스 에릭손이 평생의 연구로 보여준 것은 세계적 수준의 성취 뒤에 예외 없이 10년 안팎의 의식적인 연습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연구가 대중적으로는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면서 마치 시간만 채우면 된다는 식으로 오해되곤 하지만, 에릭손이 강조한 핵심은 시간의 총량이 아니라 지속의 성질이었다. 어제의 실패를 오늘 교정하는 고통스러운 반복을 10년간 유지하는 것, 즉 재능의 문제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끈기의 문제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시간을 채우는 일이라면 AI가 가장 잘한다는 사실이다. 1만 시간의 연산은 하루면 끝난다. 그런데도 이 법칙이 인간에게만 의미 있는 이유는, 인간은 1만 시간을 노력했음에도 되지 않았다고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들에 AI를 대입해 보면 논지가 선명해진다. 와일스가 지금 시대에 연구한다면 AI 증명 보조 도구가 7년의 다락방을 3년으로 줄여줄지 모른다. 카리코의 실험 설계도 AI가 도왔다면 더 빨랐을 것이고, 대장경 판각이야말로 기계가 하면 몇 달이면 끝날 일이다. 고민과 노동의 시간은 분명히 압축된다. 그러나 압축되지 않는 것이 있다. 증명이 무너진 뒤에도 다음 날 아침 다락방으로 다시 올라가는 발걸음, 강등 통보를 받고도 실험실 문을 여는 손, 잿더미 앞에서 다시 첫 판을 새기기로 하는 결심이다. AI는 이 부분을 대신할 수 없다. 대신할 수 없는 이유는 성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걸 수 있는 인생이 없기 때문이다. 10년을 건다는 것은 유한한 존재만이 할 수 있는 배팅이다. 인간의 10년은 남은 생의 몇 분의 일이라는 무게를 갖지만, 무한히 복제되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존재에게 10년은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것을 거는 행위는 집념이 아니다.

100년의 바톤과 인류의 숙원

10년의 집념 위에는 더 긴 시간의 층이 있다. 한 사람의 생을 넘어 다음 사람에게 바톤이 넘어가는 시간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144년이 그랬다. 가우디는 자신이 완성하지 못할 것을 알았고, 그래서 도면만이 아니라 후대가 원리를 읽어낼 수 있는 석고 모형을 남겼으며, 탑을 어느 순서로 올려야 하는지까지 정해 두었다. 일본의 이세신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례다. 이 신사는 서기 690년부터 20년마다 신전을 완전히 허물고 옆 부지에 똑같은 건물을 새로 짓는 식년천궁을 1,300년 넘게 반복해 왔다. 얼핏 보면 낭비의 극치다. 멀쩡한 건물을 왜 20년마다 부수는가? 그러나 20년이라는 주기에는 정교한 계산이 깔려 있다. 한 목수가 20대에 조수로 배우고, 40대에 장인으로 주도하고, 60대에 스승으로 가르칠 수 있는 간격이다. 즉 식년천궁은 건물을 보존하는 제도가 아니라 기술과 정신을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겨 싣는 제도다. 건물은 늘 새것이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천삼백 년을 이어져 왔다. 인류는 이렇게 개인의 수명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바톤이라는 발명품으로 극복해 왔다.

핵융합 에너지는 현재진행형의 바톤이다. 지상에 태양을 만들겠다는 이 꿈을 인류는 반세기 넘게 좇고 있다. 언제나 30년 뒤에나 실현된다는 자조 섞인 농담이 따라다닐 만큼 실패와 지연의 연속이었지만, 이 꿈은 폐기되는 대신 국경을 넘었다. 냉전이 한창이던 1985년 제네바에서 미국과 소련의 정상이 핵융합 공동 연구를 제안했고, 그 씨앗이 자라 오늘날 프랑스 남부에서 35개국이 참여한 국제핵융합실험로가 조립되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초기 설계에 참여했던 과학자들 상당수는 이미 은퇴했거나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자리를 다음 세대가 채웠고, 그다음 세대가 또 채울 것이다. 북극의 영구동토층에는 지구의 씨앗을 보관하는 국제 저장고가 산을 파고 들어앉아, 언제 올지 모를 재난의 날에 대비해 100만 종이 넘는 종자를 품고 있다. 1977년에 지구를 떠난 보이저호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태양계 바깥의 어둠 속에서 신호를 보내오고 있는데, 이 탐사선에는 언제 만날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에게 건네는 지구의 소리와 인사말을 담은 금빛 레코드가 실려 있다. 수신자가 있을지조차 모르는 편지를 수억 년의 우주에 부친 것이다. 미국 텍사스의 산속에는 1만 년 동안 멈추지 않고 작동하도록 설계된 시계가 건설되고 있기도 하다. 시계 하나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을 수 있지만, 제작자들의 답은 명확하다. 1만 년짜리 물건을 만들어 보는 경험 자체가 인류에게 1만 년짜리 생각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집념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져 100년으로, 1,000년으로 이어지는 것, 이것이 인류의 숙원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AI의 한계가 구조적으로 드러난다. 바톤이라는 것은 죽음이 있어야 성립하기 때문이다. 내 생애 안에 끝나지 않는다는 자각이 있어야 물려줄 결심이 생기고, 물려받는 쪽에도 앞사람이 바친 세월에 대한 부채감이 생긴다. 가우디의 뜻을 100년 뒤의 건축가들이 지키게 만든 것도, 잿더미가 된 대장경을 다시 새기게 만든 것도 이 부채감이다. 그리고 이 부채감이 다음 세대의 집념에 불을 붙인다. AI에게는 죽음이 없으므로 계승도 없다. 모델에는 체크포인트가 있을 뿐 유언이 없다. 이전 버전의 가중치를 이어받는 것과 스승의 못다 한 꿈을 이어받는 것은 완전히 다른 사건이다. 전자는 데이터의 복사이고 후자는 의지의 상속이다. 인간의 삶에 마감이 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인간의 약점으로 여겨졌지만, 뒤집어 보면 마감이야말로 의미의 발원지다. 시간이 유한하기에 무엇에 시간을 쓸지가 문제가 되고, 그 선택에 무게가 실리며, 끝내지 못한 것을 물려줄 이유가 생긴다. 영원히 사는 존재에게는 숙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몇 세대에 걸쳐야 하는 인류의 장기 목표, 이를테면 화성에 문명을 세우는 일이나 인간 수명의 한계에 도전하는 일이나 지상의 태양을 완성하는 일의 주어는 앞으로도 인간일 수밖에 없다. AI는 그 여정에서 인류가 가져 본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겠지만, 여정을 시작하는 것과 여정을 물려주는 것은 도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개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직과 국가도 같은 원리 위에 서 있다. 기업의 미션이라는 것은 결국 창업자 개인의 수명을 넘어 집념을 담아 옮기는 그릇이고, 100년을 넘긴 기업들의 공통점은 뛰어난 전략이 아니라 세대가 바뀌어도 놓지 않은 하나의 질문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반세기 전 맨손으로 조선소와 제철소를 세운 세대의 집념이 오늘의 한국을 만들었다면, 지금 물어야 할 것은 이 나라가 다음 반세기를 걸고 품을 숙원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AI 인프라인가, 우주인가, 에너지인가? 어느 쪽이든 답은 5개년 계획의 수사가 아니라 세대를 넘겨도 꺼지지 않을 집념의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 숙원이 없는 공동체는 아무리 많은 연산 자원을 가져도 방향 없이 빠르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요즘 부쩍 늘어난 질문, 에이전트가 사람의 일을 대체하는 시대에 대체되지 않을 직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질문이 틀렸다. 대체되지 않는 것은 특정 직업이나 특별한 방법론에 있지 않다. 직업은 기술의 파도에 따라 얼마든지 사라지고 생겨나며, 오늘 안전해 보이는 직업이 내일까지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대체되지 않는 것은 직업이 아니라 태도이며, 그 태도의 이름이 집념이다. 그러니 방법을 찾아 헤매기보다 먼저 무언가를 마음에 품기를 권한다. 열 살의 와일스가 도서관에서 문제 하나를 품었듯이, 카리코가 곰 인형 속에 전 재산과 함께 믿음을 품었듯이, 가우디가 완성을 보지 못할 성당을 품었듯이 말이다.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이 가장 실용적인 답이다. 품은 것이 있는 사람은 AI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AI가 고민의 시간을 줄여줄수록 품은 것을 향해 더 멀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품은 것이 없는 사람에게 AI는 경쟁자가 되지만, 품은 것이 있는 사람에게 AI는 사다리가 된다. 마음에 품은 그것이 재료가 되어 당신의 집념과 끈기를 받쳐줄 것이다.

가우디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나의 의뢰인은 서두르지 않는다. 당신이 마음에 품은 그것도 서두르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5분 만에 답을 얻기를 바라지 않고, 10년이 걸려도 놓지 않기를 바란다. 그 10년은 AI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시간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10년이 당신의 대체 불가능성이 된다. 지능이 흔해진 시대에 희소한 것은 지능이 아니다. 흔해진 지능을 한 방향으로 10년 동안 밀고 가는 힘, 데카르트가 인간에게서 신을 닮았다고 말한 그 자유의지의 근력이다. 집념은 연산되지 않는다. 그리고 연산되지 않는 것이 결국 인간의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