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나라, 황제의 나라

영국 랭커셔의 방직기는 18세기 말 처음 돌기 시작한 뒤로 단 한 곳에 머문 적이 없다. 면직 공장은 맨체스터에서 뉴잉글랜드로 건너갔고, 다시 일본의 오사카로, 한국의 대구로, 중국의 광둥으로, 그리고 지금은 방글라데시의 다카로 흘러갔다. 250년 동안 산업은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이동했다. 후진국이 경공업으로 출발하고, 중진국이 중공업으로 올라서고, 선진국이 서비스업으로 넘어간다. 이 이동에는 한 치의 예외도 없어 보였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발전의 법칙이라 불렀다.
그러나 법칙이라 불린 그것에는 한 가지 전제가 깔려 있었다. 생산의 주체가 사람이라는 전제다. 옷을 짓는 것도 사람이고 쇳물을 붓는 것도 사람이었기에, 임금이 생산 단가를 좌우했다. 임금이 오르면 산업은 더 싼 임금을 찾아 다음 나라로 떠났다. 일자리가 떠난 나라는 더 높은 부가가치로 올라서거나 주저앉았다. 250년의 이동은 결국 인건비의 이동이었다.
그 전제가 지금 무너지고 있다. 생산하는 손이 사람의 손이 아니게 되는 순간, 임금이라는 변수는 사라진다. 임금이 사라지면 산업이 더 싼 나라를 찾아 떠날 이유도 사라진다. AI와 로봇은 250년 동안 한 방향으로만 흐르던 강물을 그 자리에 얼려 붙이는 도구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국과 중국이 동시에 AI 앞에 섰다. 두 나라는 같은 도구를 쥐었지만, 쥔 이유가 전혀 다르다. 그 차이를 읽지 못하면 앞으로 다가올 10년의 어떤 장면도 해석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강을 건넌 나라
먼저 이 강물이 어디까지 흘러왔는지를 봐야 한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중국으로 산업이 옮겨가는 동안, 그 강을 끝까지 건너 반대편 언덕에 오른 나라는 놀랍도록 적었다. 세계은행이 정의한 중진국의 함정이 바로 그것이다. 가난한 나라가 중간 소득까지 오르는 일은 흔하지만, 중간 소득에서 고소득으로 넘어서는 일은 드물다. 2차 대전 이후 절대 빈곤에서 출발해 5천만에 이르는 인구를 거느린 채 선진국 반열에 오른 나라는 사실상 한국 하나다. 세계은행은 한국을 그 문턱을 마지막으로 통과한 인구 대국으로 기록한다. 1960년대 초 1인당 소득이 100달러 안팎이던 나라가 지금은 3만 달러를 넘는다. 같은 출발선에 섰던 라틴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의 수많은 나라들이 중간 어딘가에서 멈춰 선 동안, 한국만이 강을 끝까지 건넜다.
여기서 오래된 질문 하나를 다시 던질 필요가 있다. 미국은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일본의 등을 꺾었다. 엔화를 강제로 끌어올렸고, 그것이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으로 들어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 직후 무서운 속도로 추격하던 한국에게는 왜 그런 견제를 따로 두지 않았는가? 한국이 약해서가 아니다. 견제의 기준이 국가의 크기나 성장 속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견제하는 대상은 미국이 짠 질서 자체를 위협하는 나라다. 1980년대의 일본은 단순히 자동차와 반도체를 잘 만드는 나라가 아니었다. 일본은 미국의 부동산을 사들이고, 미국의 금융을 흔들고, 미국식 자본주의의 정점에서 미국을 추월할 기세였다. 일본은 미국이 만든 질서 안에서 미국의 자리를 노렸다. 그것이 견제의 진짜 이유였다. 반면 한국은 그 질서를 위협하지 않았다. 한국은 미국이 설계한 공급망 안에서 충실한 부품을 만들었을 뿐, 질서의 설계도 자체를 넘보지 않았다. 위협의 크기가 아니라 위협의 종류가 달랐던 것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미국이 중국을 뒤늦게 경계하기 시작한 이유도 분명해진다. 중국은 오랫동안 미국이 만든 질서 안에서 가장 값싼 공장 노릇을 했다. 미국은 중국을 자본주의의 맛에 길들이면 결국 미국의 질서에 복속되리라 믿었다. 그 착각이 깨진 것이 2008년이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미국식 모델의 균열이 만천하에 드러난 그 순간, 중국은 처음으로 자신이 다른 질서를 세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중국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뒤인 2018년이다. 그 무렵 미국은 단일 패권으로 세계 전체를 통제하던 방식을 포기하고, 진영을 나누어 다극의 질서 속에서 자기 편을 단속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전환은 미국이 강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모든 강물을 혼자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데서 나왔다.
여기서 너무 잘 알려진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꺼낼 생각은 없다. 그 비유는 기원전 431년부터 404년까지 약 27년간, 아테네와 스파르타라는 두 강국이 각자의 동맹을 거느리고 벌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길어 올린 교훈이다. 떠오르는 세력과 기존 세력이 부딪치면 전쟁이 난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안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패턴은 미래를 예측하는 데 거의 쓸모가 없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인식에 머무는 순간, 우리는 다음에 벌어질 일을 그저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정말 알아야 할 것은 두 나라가 무엇을 원하는가이다. 목적을 알면, 그들이 전쟁까지 불사하며 이 길을 가려 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확신할 수 있다.
신의 나라와 황제의 나라
미국과 중국의 목적은 닮은 구석이 거의 없다. 두 나라는 서로 다른 신화 위에 세워졌다.
미국은 기독교의 나라다. 황제와 왕이 대관식에서 교황에게 신권을 부여받았듯, 미국의 대통령은 취임 선서를 할 때 성경에 손을 얹는다. 이 나라를 세운 청교도들은 자신들이 신에게 선택받은 백성이며, 유럽이 2000년 동안 끝내 만들지 못한 진정한 신의 나라를 신대륙에 세웠다고 믿었다. 그 믿음에서 나온 것이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다. 서쪽으로 끝없이 나아가 신의 뜻을 실현하는 것, 신의 대리자로서 자신들의 질서를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다. 미국은 단순한 강대국이 아니라 제국이다. 그런데 미국식 제국은 땅을 넓히고 이민족을 몰아내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미국의 확장은 관념과 이념까지 하나로 묶으려는 통일이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영토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머릿속까지 같은 질서 아래 두는 것이다.
중국은 전혀 다른 신화 위에 있다. 국공내전이 끝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들이 이루려는 것은 두 가지가 겹쳐 있다. 하나는 황제의 오래된 열망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 국가의 완성이라는 신념이다. 여기서 황제란 중화의 중심에 서는 자를 말한다. 중심에 선 자에게 그 바깥은 모두 오랑캐이며, 언젠가 밀어내거나 복속시켜야 할 존재다. 중원과 그 중원을 위협하는 경계의 모든 부분까지 통일해야 비로소 황제라 부를 수 있고, 그렇게 완성된 것을 제국이라 한다.
그래서 중국에게 대만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통일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대만은 아직 통일되지 않은 땅이며, 같은 한족이 다스리는 땅이고, 중국에 직접 위협이 되는 땅이다. 제국이 되려는 꿈이 대만과의 통일에서 완수되니, 국가의 원수가 그것을 꿈꾸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중국은 다른 나라들과 근본 구조가 다르다. 중국에서는 국가가 가장 위에 있지 않다. 국가 위에 중국공산당이 있고, 군대조차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인민해방군, 즉 당의 군대다. 이 구조는 무엇을 뜻하는가? 아직 대만을 통일하지 못했기에, 중국은 여전히 안정된 국가가 아니라 투쟁하는 당의 상태로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만 통일이 이루어지는 순간, 비로소 중국은 국가를 최상위에 놓고 시스템 전체를 재편할 명분을 얻는다. 그리고 그 재편된 국가의 정점에 시진핑 본인이 황제로 올라서려 한다. 지금의 중국공산당은 집단지도체제 위에 시진핑이 임시로 단독 체제를 얹어 놓은 불안정한 상태다. 임시방편에는 명분이 부족하다. 명분이 없으면 그 자리는 오래가지 못한다. 시진핑이 자신의 권력을 영구히 지속할 유일한 길은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것이고, 시스템을 바꿀 명분은 통일이 가져다준다. 대만은 그래서 한 인간의 야망과 한 제국의 완성이 정확히 겹치는 지점에 놓여 있다.
신의 나라는 자신의 질서를 세상 끝까지 전파하려 하고, 황제의 나라는 경계 안의 모든 것을 중심으로 끌어당기려 한다. 하나는 바깥으로 퍼지는 원심력이고, 다른 하나는 안으로 모으는 구심력이다. 이 두 힘이 태평양 위에서 정면으로 마주쳤다.
깃발 아래의 안전과 임대된 소유
목적을 알았으니 이제 수단을 봐야 한다. 같은 목적이라도 수단이 다르면 흐름이 달라진다. 두 제국이 손에 쥔 무기는 서로 정반대를 향한다.
미국의 수단은 안전한 공급망의 통제와 과학기술이다. 공급망 통제의 핵심은 달러다.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아 세계의 모든 물건이 달러로 교환되게 만들고, 그 질서를 위협하는 나라는 제거의 대상으로 삼는다. 플라자 합의로 일본의 등을 꺾은 것이 그 첫 시범이었다. 제국은 위협을 느끼면 경계를 줄이더라도 안전한 선을 긋는다. 한국전쟁의 불씨가 된 애치슨 라인이 바로 그런 선이다. 이 선을 넘어오면 죽는다는 신호이자, 이 선 안에 있으면 보호한다는 약속이다.
이 방식은 로마를 닮았다. 로마의 깃발 아래에 들어온 자는, 설령 그가 이민족일지라도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안전과 번영을 보장받았다. 미국의 공급망 안에 들어온 나라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서는 안전과 연속적인 경제 활동이 보장된다. 다만 로마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미국은 이 깃발 아래에 관념의 영토까지 포함시켰다. 관념의 영토란 가상의 세계, 곧 우리가 흔히 서비스업이라 부르는 것이다. 구글, 애플, 메타, 아마존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거대 기업들이 지배하는 곳이 바로 그 영토다.
이것이야말로 미국의 발명이다. 신의 나라가 확장하는 땅은 반드시 물리적 영토일 필요가 없다. 사람의 생각을 지배할 수 있다면, 디지털이라는 가상의 대륙 위에서도 깃발은 꽂힌다. 미국은 명백한 운명이라는 신화 속에서, 정복할 땅이 사람의 머릿속이어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정복을 가능하게 한 것이 또 하나의 수단인 과학기술이다.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컴퓨터, 스마트폰까지, 현대를 채운 거의 모든 물건의 원형은 미국에서 나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과학기술은 미국의 관념을 공급망 안의 모든 사람에게 실어 날랐다. 그 경계 안에 있는 한국을 생각해보면 답은 분명하다. 한국은 공자의 나라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나라인가? 한문이 더 익숙한가, 영어가 더 익숙한가? 답을 떠올리는 순간, 우리가 누구의 깃발 아래에 살고 있는지 알게 된다.
중국의 수단은 정반대 방향에 있다. 자본화된 공산화와 천재 시스템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반대가 공산주의라고 배웠다. 그렇다면 자본화된 공산화란 대체 무엇인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분석하며 지적한 핵심은 잉여이익이다. 자본가는 잉여이익으로 배를 불리고, 그 이익을 키우려 노동자를 착취한다. 그래서 이익을 만들어내는 생산 수단을 공유하자는 것이 공산주의다.
그런데 지금 중국의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의 원형과 크게 다르다. 생산과 자본은 각자의 능력만큼 가질 수 있되, 영원한 소유는 없다. 개인이 쥐는 것은 임시 사용권일 뿐이고, 진정한 소유권은 공산당이 쥔다.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집을 빌려주지만 계약이 끝나거나 위반되면 사용권을 거둬들이는 것과 같다. 이것이 중국의 발명이다. 이 방식 덕분에 중국은 미국에게 자본주의의 단맛을 보여주면서도, 자신이 결코 자본주의에 복속되지 않을 안전판을 마련했다. 마르크스주의를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본주의의 장점만 빨아들이는 이 기묘한 발상을, 중국은 가장 똑똑한 인재들을 모아 설계했다.
그 인재들이 두 번째 수단인 천재 시스템에서 나온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소수의 천재를 공산당 안에서 어릴 때부터 길러 그 두뇌를 당의 목적에 사용해왔다. 그런데 1980년대 중후반부터 이 시스템의 방향을 바꿨다. 가장 뛰어난 두뇌를 당의 조직이 아니라 산업과 과학기술로 흘려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똑똑한 아이가 권력의 사다리가 아니라 공과대학으로 향하도록 국가가 설계했다. 지금 중국이 보여주는 기술 굴기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당으로 가던 천재의 물길을 공장과 실험실로 돌려놓은 것, 그것이 오늘의 중국을 만들었다.
미국은 깃발 아래의 안전을 판다. 중국은 임대된 소유를 판다. 미국의 무기가 바깥을 향한 통제라면, 중국의 무기는 안을 다잡는 장악이다. 그리고 이제 두 무기가 동시에 AI라는 같은 손잡이를 잡았다.
60퍼센트를 위한 기계
중국이 왜 AI에, 그리고 그것을 넘어 에이전트와 휴머노이드에 국가의 사활을 거는지를 이해하려면, 중국 인민이 지금의 공산당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부터 봐야 한다. 우리도 경제가 성장하고 배가 부르던 시절, 어느 정도의 독재를 묵인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중국 인민이 공산당을 용인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이만한 규모의 중산층이 이만큼 배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공산당은 모두가 비교적 풍족하게 사는 샤오캉 사회를 약속했고, 2021년 전면적 샤오캉 사회의 달성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 선언의 안쪽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020년 리커창 총리는 전국인민대표대회 폐막 기자회견에서 놀라운 숫자를 입에 올렸다. 14억 인구 가운데 6억 명의 한 달 수입이 1,000위안 안팎에 머문다는 것이다. 우리 돈으로 17만 원 남짓이다. 비교적 풍족하다 할 만한 중산층은 전체의 40퍼센트 안팎이고, 나머지 60퍼센트는 여전히 한 달에 20만 원 안팎으로 살아간다. 진정한 샤오캉이라면 인구의 대다수가 풍족해야 하지 않는가? 지금의 샤오캉은 기껏해야 40퍼센트의 샤오캉일 뿐이다.
바로 이 60퍼센트가 오늘날 중국의 값싼 임금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많은 경공업이 이미 방글라데시와 인도와 동남아로 넘어갔다. 그러나 넘어간 것은 조립 공정일 뿐, 원료와 원자재는 여전히 중국에서 나간다. 방글라데시의 봉제 공장은 중국의 실 없이는 돌아가지 않고, 그 옷에 달리는 단추 하나까지 중국에서 만들어진다. 조립은 내주되 공급망은 중국 안으로 돌려 수직계열화를 완성하는 것, 이것이 중국이 산업에서 택한 길이다.
여기서 중국이 AI를 왜 그토록 다급하게 국가 과제의 정점에 올렸는지가 드러난다. 2025년 8월, 중국 국무원은 AI+ 정책의 실행 지침을 발표했다. 차세대 지능형 단말기와 AI 에이전트의 보급률을 2027년까지 70퍼센트, 2030년까지 90퍼센트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숫자가 아니라 그 문서가 내건 명분이다. AI를 통해 생산력의 혁명적 도약과 생산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이루고, 사람과 기계가 협력하며 성과를 함께 나누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겠다고 적혀 있다. 생산관계의 변화와 성과의 공유라는 표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말한 생산의 공유화를 AI의 언어로 다시 쓴 것이다.
여기에 휴머노이드가 더해진다. 2025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에 출하된 휴머노이드 로봇의 약 90퍼센트가 중국산이었다. 중국은 이 산업을 2026년부터 시작되는 15차 5개년 계획의 핵심 과제로 못 박았고, 한 해 1만 대 규모의 생산 라인이 이미 가동에 들어갔다. 다른 나라들이 휴머노이드를 신기한 구경거리로 바라보는 동안, 중국은 이미 그것을 공장과 발전소와 물류 센터에 밀어 넣고 있다.
이 모든 조각을 맞추면 그림이 완성된다. 지금 전 세계가 AI를 보며 똑같은 걱정을 한다. 일자리가 줄고, 줄어든 일자리만큼 사라진 소득을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그 답으로 거론되는 것이 기본소득이다. 그런데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 생산을 공유한 결과물을, 노동하지 않는 이에게도 다시 나눠주는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200년 전부터 말해온 생산의 공유와 그 재분배와 완전히 같은 구조다. 다른 나라에게 AI 시대의 기본소득은 풀어야 할 난제이지만, 중국 공산당에게 그것은 자신들이 처음부터 약속했던 이상의 실현 그 자체다.
그래서 중국에게 AI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60퍼센트를 진정한 샤오캉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약속을 인간의 값싼 노동으로는 영원히 지킬 수 없다. 자동화와 휴머노이드로 생산을 공유화하고 그 과실을 재분배하는 것만이, 공산당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할 유일한 길이다. 뒤가 없는 자는 물러서지 않는다. 중국이 미국과의 전쟁마저 불사할 듯 보이는 것도, 최근 들어 중국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이 절박함으로 설명된다. AI는 중국에게 더 잘 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한 도구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디에 서 있는가? 미국은 이미 제조의 상당 부분을 중국에 내주었고, 이제 한국과 일본과 독일 같은 우방에 제조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물리적 제조를 동맹에 기대야 하는 미국에게, AI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제조는 빌리더라도 그 위에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 곧 AI만큼은 자국이 독점 공급하여 공급망 전체의 목줄을 쥐겠다는 것이다. 깃발 아래의 안전을 파는 제국이, 이제 그 안전의 핵심을 AI로 옮겨 쥐려 한다.
다만 미국의 최근 행보에는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2025년 한국과 일본 같은 동맹국에까지 25퍼센트의 관세를 들이댔다가, 거센 협상 끝에 막대한 투자 약정을 받아내며 세율을 15퍼센트까지 끌어내렸다. 적이 아니라 같은 깃발 아래의 우방을 향한 압박이다. 역사 속에서 제국이 우방을 쥐어짜기 시작할 때는, 대개 제국이 절정을 지나 기울기 직전이었다. 안에서 충분히 거둘 수 없게 된 제국이 바깥의 동맹에게서 억지로 거두려 할 때, 그것은 힘의 표현이 아니라 불안의 표현이다.
물론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다. 미국의 명백한 운명은 여전히 확장을 향한다. 그 확장은 이제 서쪽이라는 2차원의 수평선을 넘어, 위쪽이라는 3차원의 수직선으로 옮겨가고 있다. 달과 우주가 새로운 서부다. 만약 미국이 명백한 운명의 깃발을 우주로 꽂고, 그 위에 디지털 생태계라는 관념의 영토를 계속 넓혀간다면, 미국이 현대의 거의 모든 물건을 발명했듯 또 한 번의 패러다임 전환을 일으킬 수도 있다. 반대로 미국이 리쇼어링이라는 이름으로 우방의 제조업을 빼앗는 데만 매달린다면, 그것은 기울어가는 제국의 마지막 발버둥에 그칠 것이다. 어느 쪽으로 갈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신의 나라는 자신의 질서를 우주 끝까지 전파하려 하고, 황제의 나라는 60퍼센트의 인민을 기계의 힘으로 끌어안아 마침내 황제의 관을 쓰려 한다. 두 제국 모두에게 AI는 더 잘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한 도구다. 같은 무기를 전혀 다른 절박함으로 쥐었기에, 이 충돌은 어느 한쪽이 가볍게 양보하며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지금까지 적은 것은 예측이 아니라 예상이다. 미국과 중국이 어떻게 부딪칠지, 그 사이에서 한국과 일본 같은 나라들이 어떤 길을 걸을지는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막연한 예상을 정교한 예측으로 바꿔낼 때에만, 비로소 안전한 세상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강물이 얼어붙은 지금, 그 얼음 위에 누가 먼저 깃발을 꽂느냐가 다음 100년을 정한다. 우리는 그 얼음판 한가운데에 서 있다.
참고 자료
- 소강사회 (샤오캉) — 위키백과, 리커창 총리의 6억 명 월소득 발언 포함
- World Bank, World Development Report 2024: The Middle-Income Trap (세계은행 중진국 함정 보고서)
- How South Korea avoided the ‘middle-income trap’ — South China Morning Post
- 중국 국무원 ‘AI+’ 정책 전문 번역 — Center for Security and Emerging Technology (CSET)
- China is winning the humanoid robot race — Rest of World (중국 휴머노이드 시장 90% 장악)
- 플라자 합의 — 위키백과
- Presidential 2025 Tariff Actions: Timeline and Status — U.S. Congress (트럼프 동맹국 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