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슬라 공급망 분리와 AI 분열

최근 전기차 기업 테슬라가 미국에서 생산되는 차량에 중국산 부품을 배제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로써 테슬라는 공급망에서 ‘탈중국’을 공식화한 가장 최신 사례가 되었다. 미·중 갈등과 관세 부담 속에서, 테슬라와 그 협력업체들은 이미 일부 중국산 부품을 타국산으로 대체했으며 향후 1~2년 내에 미국 공장에서 생산하는 모든 차량 부품을 중국 이외 지역에서 조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미국의 GM도 2027년까지 중국산 부품을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어, 자동차 산업 전반에 공급망 디커플링 추세가 가속화되고 있다.
테슬라의 이 같은 결정은 단순한 기업 전략 변경을 넘어 세계 기술 질서의 변화를 시사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나의 제품에 다양한 국가의 부품과 기술이 쓰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이제는 동일 제품도 판매되는 지역에 따라 완전히 다른 공급망과 기준을 적용받게 될 전망이다. 글로벌화 시대에 형성된 통합된 기술 표준과 생산망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테슬라의 사례는 첨단 제조업에서 미·중 양국이 갈라서는 초기 징후로 볼 수 있다.
세계화 40년의 종언, 여러 개의 프로토콜 시대
지난 40여 년간 우리는 세계화에 기반한 단일한 기술 표준과 프로토콜의 시대를 누려왔다. 냉전 종식 이후 전 세계가 비교적 자유롭게 교류하며, 인터넷부터 통신 규약, 산업 표준에 이르기까지 전 지구적 공통 규범이 자리 잡았다. 예컨대 누구나 동일한 전자제품 규격을 쓰고, 동일한 인터넷과 스마트폰 플랫폼을 활용하며, 같은 검색엔진에서 정보를 찾는 세계가 펼쳐졌었다. 이러한 통합된 시스템 덕분에 효율성과 편의성,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미·중 전략 경쟁의 본격화와 지정학적 갈등(우크라이나 전쟁 등)은 이 평화로운 통합 시대에 균열을 내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기술 수출 통제, 각국의 디지털 주권 강화 움직임이 맞물려, 세계는 다시 여러 개의 블록으로 분절될 조짐이다. 이는 과거 미국과 소련이 이념과 군사로 대립했던 양극 체제와도 다르다. 과거 냉전기에도 기본적인 과학기술 규격이나 산업 생산 방식은 어느 정도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시대는 보다 철저히 분리된 “멀티 프로토콜” 세계가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각각 다른 기술 생태계, 상호 호환되지 않는 표준과 규범이 자리잡는다면, 인류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불편함과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60대 이하의 현 세대는 대부분 이런 다중 체제를 경험한 적이 없다. 1990년대 이후 태어난 사람들은 인터넷과 글로벌 플랫폼이 당연한 배경인 가운데 성장했다. 이들에게 세계의 단절은 생소하고 두려운 개념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스마트폰 하나를 사더라도 어느 진영의 표준인지 따져야 하고, 온라인 서비스를 이용할 때도 국가별로 다른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 세계화 시대의 편리함이 사라지고 지역마다 다른 규칙이 우선하는 복잡한 환경은, 사회·문화적 충격과 불편으로 다가올 것이다.
게다가 이번 분열은 단순한 다극화가 아니라 승자독식의 성격을 띨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기술 패권을 잡는 쪽은 자신의 표준을 강요하며 경제적 이익과 영향력을 독점하고, 뒤처진 국가나 기업은 시장에서 퇴출당하는 식의 극단적인 양극화가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일부에서는 최악의 경우 패권 경쟁의 패배자는 경제적 몰락뿐만 아니라 문화적·인적 희생까지 겪게 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제기된다. 그만큼 기술 및 AI 주도권 경쟁이 국가의 사활을 좌우하는 핵심 전장이 되고 있다.
다른 스펙이 부르는 AI 기술의 분열
테슬라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이 기업은 세계 곳곳에 공장을 세워 현지 시장에 맞는 차량을 생산해왔다. 그런데 공급망이 양분됨에 따라, 겉보기엔 똑같은 테슬라 차량이라도 미국산과 중국산이 내부적으로 다른 스펙을 갖추게 될 전망이다. 부품만 다른 게 아니다. 오늘날 자동차는 바퀴 달린 컴퓨터라 불릴 만큼 소프트웨어와 AI의 비중이 높다. 특히 테슬라 차량에는 자율주행을 비롯한 AI 모델이 “두뇌” 역할을 한다. 여기서 중대한 변화가 시작된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테슬라 차량에는 중국 시장의 데이터와 규범에 맞춰 학습된 자율주행 AI가 탑재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엄격한 데이터 국외 반출 금지 정책을 시행하고 있어, 중국 내에서 수집된 주행 데이터가 해외로 나가는 것을 제한한다. 일례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도 “중국에서는 현지 데이터를 해외로 가져올 수 없기 때문에, 테슬라가 현지 학습 데이터 없이도 최고 성능을 냈다”는 취지로 언급한 바 있다. 이는 테슬라가 중국 전용 데이터센터를 설립하고 현지에서 데이터를 보관·처리하도록 한 조치와 맥을 같이한다. 결국 중국 내 테슬라의 자율주행 알고리즘은 중국 도로 환경과 규칙, 운전자 성향에 맞춰 개별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반면 미국과 그 우방 국가들에서는 테슬라의 AI를 글로벌(사실상 미국 주도) 데이터로 계속 발전시킬 것이다. 미국은 첨단 차량 데이터와 AI 소프트웨어를 중국에서 훈련하는 것을 사실상 금지하고 있으며, 중국도 자국 데이터를 미국에 주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같은 테슬라 브랜드 차량이라도 미국형 AI와 중국형 AI가 따로 존재하게 된다. 중국 공장에서 만들어진 테슬라는 중국인처럼 운전하고, 미국 공장에서 만들어진 테슬라는 미국인처럼 운전하는 상황이 전개되는 셈이다.
지금은 단지 운전 스타일과 도로 규제의 차이 수준으로 보일 수 있다. 예컨대 중국 도시에서 통용되는 과감한 끼어들기나 속도 감각이 미국 도로에서는 위법이 될 수 있고, 반대로 미국식 철저한 교통법규 준수는 중국 운전자들에게 답답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테슬라 AI가 각자 현지의 “운전 문화”를 학습하게 되면 이런 차이가 실제 차량 거동으로 나타날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 자동차뿐 아니라 생활 전반의 제품과 서비스에 AI 모델이 내장될 것이란 점이다. 가령 스마트폰 AI 비서, 자율주행 드론, 상거래 AI 에이전트, 의료 진단 AI 등 수많은 AI 기반 시스템들이 지역별로 따로 개발되어, 자신이 훈련된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
즉 “다른 스펙이 낳은 다른 AI”가 결국 서로 다른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는 전망이다. 한 세계의 AI는 다른 세계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호환이나 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가 될 수 있다. 기술적으로는 각각 최적화되었을지 몰라도, 인류 전체로 보면 지식과 경험의 단절이 발생한다. 마치 한 집단은 라디오 주파수로 의사소통하고 다른 집단은 인터넷으로 의사소통하는데 서로 주파수가 맞지 않는 격이다.
AI 분열이 초래할 문화적 충돌과 윤리적 딜레마
이러한 AI 생태계의 분리는 단순한 기술 호환성 문제를 넘어 심각한 문화적·윤리적 도전을 야기할 수 있다. 정보기술의 세계화 시대에는 전 인류가 동일한 플랫폼에서 소통하고 대체로 공유되는 윤리 의식을 논할 수 있었다. 예컨대 인터넷에서 무엇이 허용되고 금지되는지에 대한 글로벌 기준, AI 윤리에 대한 국제적 원칙 등이 꾸준히 논의되어 왔다. 비록 문화권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가 같은 테이블에 앉아 보편적 가치와 인권, 안전에 대해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AI 모델이 문화권별로 따로 진화한다면, 이들 모델이 내리는 판단과 행동 기준도 제각각 달라질 것이다. 한 사회에서는 용인되는 행동을 다른 사회의 AI는 비윤리적이라고 간주할 수 있고, 반대로 어떤 AI에게는 금기에 속하는 일이 다른 AI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우려되는 것은, 폐쇄된 세계관 속에서 훈련된 AI일수록 자기 집단 밖의 존재에 공감이나 도덕적 고려를 하지 못할 위험이다.
예를 들어 극단적으로, 자신의 문화와 데이터로만 학습된 AI 무기나 첩보 시스템을 상상해보자. 해당 AI는 타국이나 다른 문화권 사람들의 생명과 권리를, 학습된 경험에 없거나 별개의 범주로 취급할 수 있다. 그 결과 타 집단에 대한 가혹한 행위도 주저하지 않게 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시나리오는 과장이더라도, 최소한 정보 왜곡과 상호 불신이 심화되는 것은 현실적인 걱정이다. 이미 인터넷상에서 각국의 여론은 갈라진 지 오래이며, AI 추천 알고리즘은 필터 버블을 강화하고 있다. 이것이 아예 국가 단위 AI 생태계의 상이함으로 굳어진다면, 세계 시민들이 동일한 사실관계를 공유하지 못하고 각자 다른 현실을 살아가는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결국 AI 분열 시대에는 도덕적 보편성의 실종이 문제가 된다. 과거에는 이념이나 종교의 차이로 인한 갈등도 있었지만,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과 생명에 대한 가치만큼은 국제사회가 공통으로 지키려 애써왔다. 그러나 AI가 “우리 편 가치”만 철저히 대변하게 될 경우, 각 진영의 기술은 상대 진영을 악으로 간주하거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인류가 거대한 오해와 증오의 벽을 쌓는 데 AI가 기여하는, 끔찍한 미래를 피하려면 지금부터 대비가 필요하다.
한편, 기술 분열이 혁신의 둔화와 소비자 불편으로 이어질 우려도 있다.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었을 때 기업들은 규모의 경제 속에 비용을 낮추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폭넓게 활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분절된 환경에서는 시장이 쪼개지고 표준 경쟁이 벌어져 비효율과 중복투자가 증가한다. 소비자들은 기기와 소프트웨어의 호환성 문제로 골치를 앓고, 어느 한쪽 생태계에 종속되면 다른 쪽 세계와 단절되는 폐쇄성을 감수해야 할지 모른다. 이는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퇴보다.
물론 각국이 자국의 가치와 법에 맞는 ‘주권적 AI’를 추구하는 흐름 자체는 이해할 만하다. AI가 국가 안보와 직결되고, 사회 질서를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지면서, 자율성과 통제권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은 자연스럽다. 미국은 최첨단 반도체와 거대 모델로 앞서 나가고, 중국은 막대한 데이터와 국가 주도의 전략으로 맞서며, 유럽은 개인정보 보호와 신뢰성 등 자기 색깔의 규제와 기술을 내세우고 있다. 각자 자기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공통분모를 완전히 잃어버린다면, 결국 모두가 패자가 되는 게임이 될 수 있다.
다극화 시대의 아이스브레이커를 찾아서
역사는 언제나 반복되지만, 반드시 같은 형태로 반복되지는 않는다. 신냉전이라 불리는 현 시대 상황도 과거 냉전과는 양상이 다르지만 참고할 교훈은 있다. 냉전 시기에도 미국과 소련은 철저히 대립했지만, 올림픽 같은 국제 행사나 과학 교류를 통해 최소한의 연결 고리를 유지했다. 전 세계가 완전히 둘로 쪼개지지 않도록 스포츠·문화 행사가 아이스브레이커 역할을 한 것이다. 그 덕분에 냉전 아래서도 인류는 부분적으로나마 공통의 경험과 성취를 쌓을 수 있었다. 1970~80년대 올림픽에서 미·소 양 진영 선수들이 경쟁하며도 스포츠맨십을 보여준 장면, 1975년 우주에서의 미·소 합동 프로젝트(아폴로-소유즈 협력) 등은 상징적 사례다. 이러한 접점들이 완전한 소통 단절을 막는 안전판 노릇을 했다.
21세기 다극화 시대에도 비슷한 접점이 필요하다. 갈라진 기술 세계를 이어줄 공통의 언어와 규범을 모색해야 한다. 이는 국제 기구나 다자 협력을 통해 글로벌 거버넌스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AI 윤리와 위험에 관한 최소한의 글로벌 기준을 정하거나, 핵심 기술 표준에 대해 상호 호환성을 보장하는 협정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경제 분야에서도 특정 국가만의 배타적 이익이 아니라 공급망 안전과 인류 공동 번영을 위한 신뢰 구축이 요구된다. 탈세계화 흐름이 불가피하다 해도, 완전히 담을 쌓기보다 서로 다른 시스템을 연결하는 다리들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AI 분야에서는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모델 개발과 다양성의 존중 간 균형을 찾는 노력이 시급하다. 각 문화권이 자율성을 가지면서도, 인류 보편의 윤리 원칙(인간 존엄, 생명 보호, 기본권 존중 등)은 공유하는 AI를 만드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다. 이는 기술적으로도 어려운 도전이지만, 국제 협력을 통해 충분히 논의해볼 가치가 있다. 앞서 우려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려면, AI 개발자와 정책입안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글로벌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물론 현실은 냉혹하다. 강대국들은 기술 패권 경쟁에 여념이 없어서 규범 조율에 나설 여유나 의지가 약하다. 자국 우선주의 흐름 속에서 서로 양보하며 규칙을 만드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그렇기에 오히려 중견국가들의 지혜와 역할이 요청된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초강대국 사이에서, 갈등을 완화하고 협력의 끈을 잇는 중재자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중간자의 역할과 중간자 AI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어떠한 길을 가야 할까? 한국은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미·중 갈등의 한복판에 놓인 국가다. 안보 측면에서는 미국과 동맹이지만, 경제 교류에 있어 중국 비중도 크다. 또 한국 자체가 세계 10위권의 기술 강국이며, 반도체·ICT 분야에서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중간자적 위치는 위기인 동시에 기회다. 한국은 양 진영 중 하나에 일방적으로 편승하기보다, 양쪽에 모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가교 역할을 추구할 수 있다.
첫째, 한국은 국제 AI 윤리 및 표준 논의의 조정자로서 나설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미·중 패권 경쟁으로 정작 AI 안전장치나 윤리 규범 마련은 뒷전인 상황이다. 이 공백을 메우는 데 한국이 기여할 여지가 있다. 한국은 높은 ICT 인프라와 교육 수준, 그리고 한류로 대표되는 소프트파워를 갖추고 있어 문화적 영향력도 지니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중립적이고 합리적인 중재안을 제시하며, 각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한의 AI 안전망을 구축하는 대화에 앞장설 수 있다. 예컨대 국제기구에서 AI 개발 가이드라인을 수립하거나, 다자 협정을 통해 AI 남용 방지 조약을 논의할 때 중추적인 역할을 맡는 것이다. 이는 도덕적 리더십을 발휘함과 동시에 향후 한국 기술정책의 발언권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둘째, 기술적으로도 중간자적 혁신을 추구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이 각각 독자 생태계를 키우는 와중에 한국 기업들은 양쪽과 모두 협력 가능한 기술 솔루션을 제공하는 전략을 취할 수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현지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한국 기업들은 멀티 로컬 전략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각 지역 문화와 규제에 맞게 유연하게 변형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동시에 한쪽에 치우친 기술이 아닌 범용성 있는 핵심 기술(예: 메모리 반도체, 소재 부품, 제조 장비 등)을 강화하여 어떤 블록에서도 환영받는 공급자가 될 수 있다.
특히 AI 분야 인재와 기업 육성에 있어 독자적인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빅테크나 중국의 BAT에 버금가는 거대 플랫폼을 당장 만들진 못하더라도, 한국어 및 다양한 언어에 특화된 자연어 처리 모델, 문화 콘텐츠에 강점이 있는 멀티모달 AI, 제조업 현장에 적용할 산업용 AI 솔루션 등 한국만의 강점 분야를 집중 육성하면 틈새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이렇게 개발된 기술은 미국이든 중국이든 필요한 곳에 공급하면서 교두보를 넓혀가는 전략을 펼쳐야 한다.
셋째, 궁극적으로 한국은 ‘중간자 AI 모델’을 선보일 수도 있다. 이것은 미·중 어느 한쪽의 가치 체계에 종속되지 않고 세계 시민 보편의 가치와 현지 맥락 적응력을 모두 갖춘 AI를 의미한다. 가령 하나의 거대 언어 모델을 개발하더라도, 특정 이념이나 문화 편향을 최소화하고 다양한 문화권의 데이터를 고르게 학습시켜 다문화적 감수성을 지닌 AI로 만드는 것이다. 또한 필요에 따라 지역별 커스터마이즈가 가능한 모듈형 AI 시스템을 설계하면, 각국의 요구에 맞게 조절되면서도 기본적으로 인류 공통의 선의를 잃지 않는 AI를 추구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이상은 달성하기 어렵겠지만, 중간 국가로서 생존하고 번영하려면 이렇게 창의적이고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 내부에서도 포용성과 국제적 소양을 키우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세계가 분절될수록 오히려 다양한 문화와 협력해온 경험이 있는 인재들이 빛을 발한다. 한국은 개방적 교육과 교류를 통해 동서양을 아우르는 안목을 지닌 인재를 양성하고, 기업들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글로벌 경영을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중간자적 역량을 갖출 때 한국은 혼돈의 다극 체제에서 오히려 새로운 리더십의 기회를 얻을 것이다.
분열 속에서 길을 찾다
분명 앞으로의 수년, 수십 년은 험난한 조정과 경쟁의 시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세계화 시대가 우리에게 안겨준 편리함과 풍요, 그리고 연결의 축복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되새기게 된다. 완전히 하나였던 세계는 효율과 통합이라는 장점을 가졌지만, 이제는 갈라진 세계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불편함과 단절이 커지고 있다. 완전한 일원화도, 완전한 분리도 해답은 아니다.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근본 가치는 공유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한다. 글로벌 기술과 경제의 핵심 축 중 하나인 대한민국은 이러한 역사적 전환기에 담대한 중간자적 역할을 자임한다면 세계 무대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섬세한 외교력으로, 한국이 분열된 세계를 잇는 다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찾아온 시대적 도전이자 기회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