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명백한 운명
문화와 플랫폼의 역학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쳐 전 세계를 휩쓴 비틀즈를 모두가 기억한다. 그들의 음악은 한 세대의 청춘을 대변했고, 문화적 혁명의 아이콘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 시대에 진짜 돈을 번 것은 비틀즈가 아니라 소니였다. 비틀즈가 재주를 부리는 동안, 소니는 라디오와 카세트테이프 기기를 팔았다. 80년대 워크맨으로 이어지는 제품 라인업으로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우리의 기억 속에는 비틀즈가 남았지만, 시장에서의 실제 가치는 소니가 가져갔다. 한마디로 문화는 위대하지만, 이 문화를 실어 나르는 것은 결국 플랫폼이다.
60년대 이후 급성장한 일본은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며 전 세계에 일본 문화를 퍼뜨렸다. 소니 워크맨은 음악 감상의 방식을 바꿨고, 닌텐도는 게임 문화를 창조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전 세계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일본 문화가 식상해지고, 90년대 버블 붕괴와 함께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되면서 그들의 문화 영향력도 함께 쇠퇴했다.
일본의 문화적 영향력이 쇠퇴한 후, 그 바톤을 받은 것이 바로 한국 문화다. 문화는 돌고 돌기 때문에 언젠가는 식상해지고, 선진국이라는 개념도 점차 약화될 수 있다. 육체가 없이 정신이 없듯, 어느 하나만 가지고서는 오래가지 못한다. 육체 없는 정신을 우리는 귀신이라 한다. 귀신은 실체가 없기에 금방 잊혀지게 된다.
결합의 힘
미국은 이보다 더 나아갔다. 미국이 슈퍼 파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두 개 다 잡으면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소비하는 대부분의 현대 제품들인 TV, 자동차,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은 미국이 발명한 것들이며, 미국이 만든 SNS라는 가상 플랫폼에서 우리는 놀고 상상까지 한다. 미국이 열어놓은 것은 육체의 안락뿐만이 아닌 정신적 세계에서의 확장까지다.
이 결합의 힘은 구체적인 기업들의 사례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애플은 아이폰이라는 하드웨어와 앱스토어라는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동시에 장악했다. 단순히 기기를 파는 것이 아니라 그 기기 위에서 돌아가는 생태계 전체를 지배한다. 구글은 안드로이드로 전 세계 스마트폰의 70% 이상을 점유하면서, 동시에 검색, 지도, 유튜브라는 필수 서비스들로 우리의 디지털 생활을 통제한다. 아마존은 전자상거래 플랫폼에서 시작해 AWS라는 클라우드 인프라로 전 세계 인터넷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다. 메타(페이스북)는 소셜 네트워크를 넘어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현실을 만들려 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순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파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활하고 소통하고 일하는 방식 자체를 설계한다는 것이다. 미국 기업들은 플랫폼을 통해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 안에서 전 세계가 놀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확인하는 것도, 친구와 연락하는 방법도, 정보를 찾는 경로도, 심지어 연애하는 방식까지도 그들이 만든 플랫폼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진정한 지배력이다.
1845년 미국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은 북미 대륙 전체로 영토를 확장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믿음이었다. 이 영토 확장의 야망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플랫폼 제국주의로 진화했다. 과거에는 땅을 점령했다면, 지금은 스크린을 점령한다. 과거에는 철도를 깔았다면, 지금은 데이터 센터를 건설한다. 과거에는 군함을 보냈다면, 지금은 알고리즘을 심는다. 우리의 정신 세계조차 그들의 판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
미국은 역사상 군사력이라는 하드파워와 문화·플랫폼이라는 소프트파워를 동시에 장악한 최초의 유일한 나라다. 로마가 군사력으로, 대영제국이 해상력으로 세계를 지배했다면, 미국은 물리적 힘과 정신적 영향력을 동시에 행사한다. 할리우드 영화로 꿈을 팔고, 실리콘밸리의 기술로 그 꿈을 실현하는 도구를 판다. 이것이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미국의 패권이 지속되는 진짜 이유다.
K-컬처의 빛과 그림자
지금 K-컬처가 세계에서 위상을 떨치고 있다. 한국에서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경우도 외국에서는 스타 대접을 받는다. 대표적으로 한국 치어리더들이 대만에서 연예인급 대접을 받는 것을 보라. K-팝 아이돌들이 빌보드를 석권하고, K-드라마가 넷플릭스 순위를 휩쓸고, K-뷰티가 세계 여성들의 화장대를 점령했다. 이것이 오늘날 K-컬처가 직면한 현실이다. BTS가 세계를 열광시키고, 오징어 게임이 글로벌 신드롬을 일으켜도, 그 경제적 과실의 대부분은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차지한다.
여기서 핵심 질문이 나온다. K-컬처를 나르는 플랫폼은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K-컬처를 담는 그릇은 K-플랫폼이 아니다. 과거 한국에서만이라도 이런 그릇이 강하게 존재했다. 10년 전만 해도 우리는 네이버에서 영상을 소비하고 멜론에서 음악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유튜브와 넷플릭스로 영상을 소비하고, 유튜브 뮤직과 애플 뮤직으로 음악을 듣는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국내에서만이라도 방어가 되었던 것이 지금은 그 방어조차 힘들어지고 있다. 멜론의 시장점유율은 유튜브 뮤직에 밀렸고, 네이버 동영상은 이미 오래전에 유튜브에 백기를 들었다.
오징어 게임이 세상을 뜨겁게 하고 있는 지금, 이 콘텐츠의 내용은 한국적이지만 IP와 모든 가치는 넷플릭스가 독식하고 있다. 창작자들은 대성공을 해도 추가 수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넷플릭스는 제작비의 수십 배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지만, 한국은 일시불 제작비만 받았다. 우리의 콘텐츠조차 빼앗기고 있는 상황이다.
절박함
더 안타까운 것은 국내 플랫폼들의 태도다. 해외로 나가지 않고 내부 경쟁에만 몰두하고 있다. 국내 시장에서의 점유율 싸움에만 매달려 있을 뿐, 진정한 글로벌 플랫폼으로 도약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5000만 시장에서 1등과 2등을 다투느라 정작 80억 글로벌 시장은 미국과 중국 기업들에게 내주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글로벌 강자가 된 것은 모두 절박함에서 시작됐다. 삼성과 현대는 가난한 나라에서 살아남을 길이 수출밖에 없다는 절박함으로 세계로 나갔고, 한화와 LIG넥스원 같은 K-방산 기업들은 북한과의 휴전 상황, 전쟁의 위협 속에서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기술을 개발하며 세계 시장을 두드렸다. 그런데 지금의 국내 플랫폼들은 어떤가? 국내 방어가 가능하다고 생각해서인지, 그 절박함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항상 절박할 때 강했고, 내부에서보다 외부인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지금 플랫폼 기업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절박함이다.
한국 플랫폼으로 향하는 정부의 야망은 꽤 좋아 보인다. 하지만 소버린 AI라는 미명하에 움직이는 것은 좀 위태로워 보인다. 소버린은 우리가 우리 자체 모델로 만들어서 해외로 나아가겠다는 게 아닌, 국내만이라도 지키겠다는 게 목표다. 우리 내부에서 지킬 게 무엇인가? 고작 5000만밖에 안 되서 내부에서 경쟁하기에는 너무 작은 시장인데, 매번 피 터지게 싸워서 하청만 못살게 굴고 내부 효율화만 강조하여 임금을 낮추거나 올리지 않게 하는 것으로 가자는 것인가? 소버린 AI는 방어 전략이지 공격 전략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방어가 아닌 공격이다. 글로벌 시장을 향한 도전이다.
글로벌 AI 플랫폼의 필요성
AI는 이제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앞으로 10년, 모든 산업의 운영체제가 될 것이다. 바이오 신약 개발에서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고, 농업에서는 작물의 생육을 최적화하며, 로봇은 AI의 두뇌로 움직이고, 우주 탐사는 AI의 계산으로 가능해진다. 모든 것이 AI에서 시작되고 AI로 연결될 미래가 코앞에 왔다. 이 파워를 가지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따라가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소버린 AI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국내용 AI를 만들어 5000만 시장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인터넷 시대에 국내 전용 인트라넷을 만들겠다는 것과 같다. AI의 본질은 데이터와 연산력, 그리고 인재의 규모의 경제다. 더 많은 데이터로 학습할수록, 더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이해할수록, 더 강력해진다. 글로벌 시장에서 학습한 AI와 한국 시장에서만 학습한 AI가 경쟁이 되겠는가?
중국을 보라. 그들이 진짜 무서운 것은 방어가 아닌 공격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자국 시장을 지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대신 오픈소스 AI 모델을 통해 미국의 독점 구조를 흔들고 있다. Llama를 능가하는 Qwen, DeepSeek 같은 모델들을 무료로 풀어 전 세계 개발자들이 사용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 공유가 아니다. 미국의 OpenAI, Anthropic 같은 클로즈드 소스 모델의 수익 구조를 무너뜨리고, 실리콘밸리 내부의 경쟁을 극대화시키는 전략이다.
중국의 오픈소스 전략은 교묘하다. 무료로 푼 AI 모델로 전 세계 개발자들의 의존성을 만들고, 동시에 그 데이터와 사용 패턴을 학습한다. 미국 기업들이 수익 모델을 고민하며 내부 경쟁에 빠져있는 사이, 중국은 글로벌 AI 생태계의 표준을 조용히 바꾸고 있다. 겉으로는 기술을 나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래의 지배 구조를 설계하고 있는 것이다.
AI 플랫폼의 싸움은 이미 시작됐다. 구글은 의료 AI로 병원을 장악하려 하고,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업용 AI로 모든 회사의 두뇌가 되려 한다. 테슬라는 자율주행 AI로 도로를 지배하고, SpaceX는 위성 AI로 하늘을 덮는다. 이들이 만드는 것은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의존성이다. 한 번 그들의 AI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빠져나올 수 없다. 마치 마약과 같다.
우리가 소버린 AI로 국내 시장을 지키는 동안, 세계는 AI 플랫폼 전쟁을 치르고 있다. 방어는 패배를 늦출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글로벌 AI 플랫폼이다. K-AI가 세계의 특정 영역에서라도 표준이 되어야 한다. 게임 AI, 엔터테인먼트 AI, 뷰티 AI - 우리가 잘하는 영역에서부터 시작해 글로벌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
시간이 없다. AI 시대의 승자는 이미 정해지고 있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미국과 중국의 AI를 사용료 내고 쓰는 신세가 될 것이다. 소버린 AI라는 안일한 방어 전략을 버리고, 글로벌 AI 플랫폼이라는 공격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생존이 걸린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도전하는 자들의 희망
그런데 희망은 있다. 당근마켓이 캐나다와 영국에서 조용히 성공을 거두고 있다. ‘Karrot’이라는 이름으로 진출한 당근마켓은 토론토와 밴쿠버에서 이미 현지인들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었다. 단순히 한인 커뮤니티를 넘어 현지인들이 “Let’s Karrot it”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리잡았다. 중고거래라는 오래된 개념을 ‘이웃과의 연결’이라는 가치로 재해석했다. 북미의 개인주의 문화 속에서도 ‘동네’라는 한국적 정서를 ‘하이퍼로컬 커뮤니티’라는 현대적 개념으로 번역해냈다.
당근마켓의 해외 진출은 조용하지만 의미 있는 성과를 내고 있다. 캐나다와 영국에서 ‘Karrot’이라는 이름으로 서비스를 운영하며 현지 시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중고거래 플랫폼이라는 단순한 기능을 넘어 ‘동네 이웃과의 연결’이라는 가치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Facebook Marketplace나 Craigslist 같은 거대 플랫폼들이 이미 자리잡은 시장에서도 ‘가까운 이웃과의 안전한 거래’라는 차별점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이런 도전이 우리나라를 살릴 것이고, 궁극적으로 K-컬처를 넘어서 K-플랫폼도 만들어질 것으로 믿는다. 당근마켓의 성공은 한국 플랫폼도 충분히 글로벌에서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네이버가 일본에서 LINE을 만들어 일본, 대만, 태국에서 국민 메신저로 자리잡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비록 많은 시도들이 실패했지만 - 배달의민족의 베트남 철수, 쿠팡의 대만 포기, 토스의 동남아 고전 - 이런 도전 자체가 중요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도전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도전 정신과 현지화 전략,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한 투자다.
더 이상 남의 뒤를 따라가는 Fast Follow 전략으로는 안 된다. 이제는 First Mover가 필요한 시점이다. K-컬처의 성공은 우리가 문화 창조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제 K-플랫폼으로 그 문화를 실어 나를 그릇을 만들어야 한다.
천년의 사대, 10년의 기회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지금 우리는 1000년 이래로 북방으로의 진출을 생각한 적이 없다. 묘청은 고려가 중국의 종속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황제국이 되기를 꿈꿨다. 그의 실패는 한국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정신을 잃고 중국에 영구 종속된 전환점이 되었다. 신채호는 이를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해석했다. 이 사건 이후 우리는 대륙이 아닌 한반도에서만 아웅다웅하는, ‘한민족’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에 갇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소국으로 전락했다.
지금은 영토를 넓히는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영토를 넓히려는 전쟁을 하게 되면 전 세계의 비난을 받으며 소프트 파워가 낮아지게 된다. 지금은 정신적인 영토가 더 중요한 시대다. 우리는 정신적 영토를 충분히 넓힐 만큼의 역량도 가지고 있다. 굳이 우리의 생각을 낮춰서 우리의 행동을 낮출 필요가 없다. 크게 생각하고 크게 행동하여 더 큰 영토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지금 우리의 K-컬처가 대단하다고 하지만, K-플랫폼을 등에 업지 않고서는 그 힘이 언젠가는 빠질 것이다. 이게 수십 년 가지 못할 것이고, 고작해봤자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20년, 아니 10년일 수도 있다. 그 안에 작게나마 K-플랫폼으로 하드웨어를 만들어서 소프트웨어를 날라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K-컬처가 뜨거운 지금이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치면 우리는 영원히 남의 플랫폼에 콘텐츠를 공급하는 하청업자로 남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K-컬처라는 비틀즈가 있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소니와 비견되는 K-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
넷플릭스와 유튜브가 우리의 것이었다고 생각해보라. BTS의 수익이, 오징어 게임의 가치가, K-드라마의 IP가 모두 우리에게 돌아왔을 것이다. 창작자들은 정당한 대가를 받고, 그 수익이 다시 한국 경제로 순환되며, 우리는 문화 강국을 넘어 플랫폼 강국이 되었을 것이다.
재주 부리는 곰이 아니라 돈 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육체 없는 정신은 귀신이다. K-컬처라는 정신에 K-플랫폼이라는 육체를 입혀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문화가, 우리의 가치가, 우리의 미래가 살아남는다.
묘청이 꿈꾼 자주독립의 정신을 디지털 시대에 실현할 때다. 1000년의 사대를 끝내고, 정신적 영토를 확장하여, 진정한 문화 강국이자 플랫폼 강국이 되어야 한다.
Fast Follow가 아닌 First Mover로, 방어가 아닌 공격으로, 국내가 아닌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